한 영혼을 진실로 섬기는 목회자, 수원은혜교회 황유석 목사님 편

추천 : 8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5-12-20 21:35

한국교회가 침체의 터널을 지나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안이 없는 이 시대적 환경 속에서 <목사월드>부흥성장하는 교회”, 특별히 다음세대를 짊어지고 가는 “40목회자들을 조명해 성장비결을 찾아보고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번에는 수원은혜교회를 탐방하고 황유석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교회를 살리는 길을 제시해 본다.

 

수원은혜교회를 개척한 황유석 목사님은 헌신된 목회로 지금의 교회공동체를 만들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이도 교회를 위해 주기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황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과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수원은혜교회 / 황유석 목사님)


1. 수원은혜교회는 2002년 설립되어 올해 13년째를 맞았고, 현재 청장년 10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개척이 힘든 시대에 출발해서 큰 성장을 이루었는데 성장비결에 대해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성장을 위해서 목회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교회성장이나 교회부흥은 보너스와 같았다고 보고, 그냥 본질에 충실하려고 애썼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한 사람 한 사람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애썼고, 소중히 여기려고 애썼죠. 지금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저랑 제 아내랑 둘이서 개척을 시작했어요. 우리 아이들하고 같이요. 첫 번째 성도가 저희 큰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선생님 부부였어요. 개척하고 한 달 정도 됐을 때 오셨죠. 그분들을 열심히 사랑하다 보니까 그 남편의 누나들이 왔고, 그 누나들 중의 한 분이 어린이집을 했어요. 또 그분을 사랑하다 보니까 그분의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왔고, 그들을 사랑하다 보니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의 엄마들, 아빠들이 왔습니다.

 

특별히 그중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진 가족이 있었어요. 요즘은 모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장애 아이들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지만 그때만 해도 다른 아이들에게 지장이 있다고 그 아이들을 잘 받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저와 어린이집을 운영하시는 집사님이 뜻을 맞춰서 장애 아이들을 받자 그리고 조건으로 우리 교회를 오게 하자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장애 아이들을 받으면서 수원은혜교회에 등록하는 조건으로 해서 온 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잘 섬기고 사랑하다 보니까 지금은 우리 교회 안수집사, 집사, 성도들이 다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에 수원은혜교회에 오게 된 사람들이 무엇에 끌려 왔을까요?

 

글쎄 그건 모르겠네요. 제가 그분들한테 물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교회에 온 사람들을 열심히 사랑한 것, 열심히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 그것이 늘 하는 일이죠. 한 사람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던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 아닐까 해요.

 

어떤 장애 아이 가족이 저희 동네에 살다가 차로 한 40-50분 가야 하는 곳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때가 2002년도 6월이었는데, 그 다음해에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됐어요. 저희 교회에는 장애 아이들, 자폐 아이들이 많아요. 그런데 보면 자폐 아이들은 환경이 바뀌는 게 안 좋아요. 그래서 이사를 갔더라도 어떻게 하든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여기 같은 어린이집을 다녀야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차편이 없었어요. 제가 오지랖이 넓어서 그 부모에게 제가 도와 줄게요그랬지요.

 

그 후에 제가 집에서 아침 7시에 나가서 장애 아이를 8시에 태워가지고 어린이집에 오면 9, 또 오후 2시에 나가서 데려다 주면 3시 반 이렇게 등하원을 시켜준 것이 6월부터 다음해 2월 말까지 8개월 정도를 했어요. 어린이집 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장애 아이 부모가 다음주에 찾아 왔었지요. 그 부모가 고맙다고 그러면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겠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잘 가라고 말을 해줬죠. 저는 어떤 결과에 대해서 연연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사람을 맡기면 많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는 거지,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한테 맡겼다고 봐요. 모든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다 그렇죠.

 

하나님께 감사한 건, 제 마음 가운데 그렇게 저를 떠났을 때 힘들고 속상한 마음보다는 내가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없다이런 생각이 더 많았던 거예요.

 

하나님이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잖아요. 개척교회를 하면서 어떻게든 처음부터 섬기려고 애쓰고, 베풀려고 애쓰려는 생각이 많았어요. 지금은 명절 때가 되면 이 지역에 있는 100-200군데 교회를 무작위로 선물을 만들어 보내요. 저는 목회자 생활하기 전에 선교사 생활을 오래 해서 연합하고 하나 되고 이런 것을 매우 좋아해요.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보낼 사람은 우리 교회에 보내고, 하나님이 옆의 교회에 보낼 사람은 옆의 교회에 보내는 것이지, 교회가 경쟁한다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2. 앞에서 말씀하셨듯이 목사님이 선교사 출신이신데 <선교사 사역>이 한국 목회사역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교사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하잖아요. 그러다보니 개척을 할 때도 저는 개척교회는 어렵다 힘들다 이런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그냥 최선을 다하면 되지, 하나님이 은혜 주시겠지이런 생각들이 많았지요. 원래 선교사들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한 사람 예수 믿게 하고, 그 사람 믿음으로 세워주고 이런 일을 하잖아요. 선교사들이 잘 부르는 찬송이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예요.

 

어떤 일이든지 안된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로 생각을 했지. 개척할 때 어머니께 빌린 1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50만원짜리 지하에서 시작했거든요. 3년 정도 됐을 때 어떤 분이 한 5천만원 헌금해줄테니 지상으로 올라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랬지요. 그리고 그분이 신년 송구영신예배 끝나고 전화를 해서 그랬어요. “다른 사람은 집사를 시키면서 왜 나는 집사를 안 시키냐?” 그래서 오신지 한 달밖에 안됐는데 어떻게 집사를 시키겠습니까? 다른 교회에서 집사를 하셨더라도 6개월 정도는 있으셔야죠?” 그랬더니 그분이 은혜 받았을 때는 젊은 목사였는데 은혜 떨어지니 어린 목사더라고 그러면서 욕하시고 떠났죠.

 

그러니까 5천만원 없던 일이 됐잖아요. 그때 성도가 30-40명 정도 됐는데 95% 이상이 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 못하나, 보증금은 뜯기는 건가생각이 들면서 성도들한테 함께 기도하자, 헌금을 하자고 했어요.

 

7천만원이 필요했죠. 5천만원은 보증금이고 2천만원은 교회를 인계하면서 이전 목사님께 드릴 비용이었어요. 우리 교회가 부자 동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도들은 초신자들이라 헌금할 사람이 없잖아요. 감사한 것이 성도들이 헌금들을 하고, 헌금할 돈은 없는데 무이자로 빌려주겠다는 성도도 있었고 그래서 총 헌금이 67만원 가량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5천만원 보증금 내고 앞에 계셨던 목사님께 2천만원 드려서 보내드리고, 7만원으로 사다리 하나 빌려서 4층으로 이사를 갔죠.

 

늘 그렇게 다음엔 2층 교육관을 얻고, 또 그 다음에는 2층 반대편 교육관을 얻고, 그 다음에 3층을 얻고 해서 2, 3, 4층을 쓰게 되었어요. 거기서 5년 정도 있다가 옮겼어요. 상가 건물이라 민원도 많이 들어오고 좁기도 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지금 교회 카페가 있는 건물로 이전하게 된 거죠. 그때 단독건물인데 비어 있기에 저희 교회 집사님들이 가봤더니 좋았어요. 저도 가서 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선교사 정신은 안된다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되게 할까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돼요. 선교지에서 항상 그렇게 훈련을 받았죠.

 

그 건물이 지하 1층에 지상 4층인데 지하가 약 200여평 지상이 1, 2, 3, 4층 한 40-50평씩이었어요. 그래서 건물 주인을 만나서 너무 좋아서 건물을 저희가 쓰고 싶은데 어떻게 안될까요?’ 그랬더니 답하시기를 다른 교회에서 지교회 한다고 많이 왔었는데 다들 안된다고 그러고 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배당의 강대상 놓는 자리 앞에 기둥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건물주께서 다른 교회들이 이것 때문에 안된다고 다 갔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할래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거 잘라가지고 밉시다.”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물어봤어요. 건물주가 한참 생각하시더니 구조 변경 기술사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측량을 했어요. 그 기술사분이 잘라도 문제가 없겠다고 결론을 냈죠.

 

나중에 알고보니 건물주께서 장로님이셨어요. 그 장로님이 저를 다르게 보시고 건물을 쓰라고 하신 거죠. 그래서 제가 얼마에 주실래요?”라고 물어봤더니 장로님이 목사님은 얼마 주실 수 있어요?” 이렇게 물어봐요. 그러면서 내가 달라면 다 줄 수 있지 않잖아요.”라고 말하셨어요. 그럼 어떻게 할지 성도들하고 고민해 가지고 7억에 6백만원을 말씀드렸지요. 어쨌든 간에 돈이 없긴 없어도 시세가 있으니까 그 정도를 안부를 수 없었죠.

 

저희가 부를 수 있는 최선의 비용을 말씀드렸더니, 그 건물 주인이 제가 노량진교회 장로입니다. 저희 담임목사님하고 얘기 했는데 교회들이 어려운데 젊은 목사가 하려고 애쓰니 해달라는 대로 해줘 그러셨습니다. 그 이하를 불렀어도 해드리려고 했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돼서 마지막까지 우리가 부른 돈을 모으려고 했는데 그 정도를 못 모았어요. 그리고 최종 6억에 5백만원으로 건물을 얻어서 쓰게 되었죠. 거기서 2년을 열심히 일했어요.

 

그 다음에 지금 교회 건물로 왔습니다. 이 교회건물을 지은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성도들이 다 떠나가는 거예요. 30여명이 남았죠. 그리고 교회가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에 안수집사님하고 권사님이 건물을 좀 인수해 달라고 절 찾아왔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잘못하면 교회가 신천지로 넘어가게 될 형편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하고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의논을 했어요. 지금까지 우리 성도들이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 오니까 제 결정을 따라주었죠. 멀리 이사 간 사람들을 빼고는 교회 초창기 때 있던 사람들 95%가 지금 다 있으니까요.

 

그래서 교인들이 100% 찬성해서 이 교회가 가진 빚 약 30억 원을 다 떠안고 들어왔어요. 이 건물을 지으신 목사님이 옛날 엔화 750, 800원일 때 엔화 대출을 받아서 교회를 지었어요. 그게 1500원대 까지 올라가니까 13억 대출이 26억이 되고, 이것저것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대출을 받아서 30억이 넘어간 거죠. 그런 상태에서 교회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이것을 제가 다 떠안았지요. 제가 원래 돈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어요.

 

그때가 2012년도 10월이었죠. 감사하게도 교회를 인수한 후부터 엔화가 많이 떨어졌어요. 그리고 최근에 엔화가 930원쯤 할 때 저희가 엔화를 원화로 대출을 다 바꿨어요. 원화는 등락이 심하지 않으니까 모두 바꿨고, 이제 빚이 15억 정도 남게 되었지요. 선교사 직분을 감당했던 게 늘 저에게는 유익했어요.




3. 목사님 설교는 쉽고, 힘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확신있는 설교, 확신을 주는 설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께 설교란 무엇입니까?

 

설교할 때는 설교 하나 가지고 목회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설교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화요일 하루 종일 주일 설교를 준비하거든요. 본문을 순서대로 설교해요. 마가복음 1장부터 어디까지, 그 다음은 이어서 어디까지,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하죠. 본문에서 포인트를 찾아내고 순서대로 설교하는데, 화요일에는 본문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면서 하나님이 이 말씀 가운데 나와 우리 교회에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를 찾아냅니다.

 

화요일에 이론적 작업을 완성시키면 보통 A4용지 7-8장 정도가 나와요. 그러면 그것을 바탕으로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서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을 살죠. 금요일 철야가 끝나고 성도들이 다 집에 가고 나면 집에 가서 잤다가 새벽 3시 정도 돼서 다시 교회에 나와요. 그리고 설교에 감성이란 옷을 입히는 작업을 해요.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메모했던 것들을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죠. 요점 정리한 자료들이 있어요. 경험한 것들, 읽은 것들, 기록한 것들 등을 총동원해 이성적으로 접근한 것이 사람들에게 조금 더 편하게 들릴 수 있도록 좋은 옷을 입히는 작업을 합니다. 살면서 넘어진 얘기, 이긴 얘기 다 담겨지는 것이죠.

 

그렇게 감성이란 옷을 입히면 보통 아침 8시나 9시가 되는데, 설교를 5장 정도로 마무리 지어요. 그리고 집에서 씻고 나와서 교육자들과 주일준비 점검하고, 토요일 하루 종일 원고를 읽습니다. 온종일 원고를 읽어서 머릿속에 한 장의 사진을 만드는 거죠. 원고는 비상시를 위해 있는 것이고,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어야 되죠.

 

저희는 토요일 오후 5시가 되면 예배 리허설팀이 다 나와요. 그래서 예배에 대한 찬양자, 사회자, 대표기도자, 안내위원들이 모두 나와서 리허설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 거예요. 대표기도에 군더더기가 있으면 그런 것들을 좀 정리해 보고, 찬양을 할 때도 우리가 좀 더 열정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반주를 이런 식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뜻을 맞추지요. 그리고 예배 리허설팀이 다 집에 간 후에 문 걸어 잠그고 혼자서 강대상에서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여섯 번 해보는 거예요.

 

다음날 교역자들이 모여서 주일 5시 새벽예배를 드립니다. 교역자들이 먼저 설교를 듣고 은혜 받고, 예배 끝나고 강대상에 올라가서 혼자 또 설교해 보는 거죠. 8시정도 되면 이제 옷 갈아입고 9시 예배에 본 설교를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요. 화요일에 외부 일정을 아예 안 잡는데, 부득이하게 화요일에 준비를 못하면 목요일에 그 시간을 정해놓지요. 사실 아내가 스케줄을 관리하는 이유도 설교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일정들을 잘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예요. 그래서 제가 제 스케줄을 모르게 살아요.

      

4. 목사님 연령이 40대입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40대에 교회개척을 시작합니다. 어떤 핵심을 가지고 개척에 임해야 하는지 <노하우, 소스>를 좀 알려 주십시오.

 

저는 개척에 대해 알고 시작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신학교를 간 이유가 단순히 한 사람이라도 예수 믿게 하고 싶어서였어요. 그래서 선교를 왜 나갔냐고 물어보면 한국보다 더 많이 전도할 수 있어서라고 말을 하죠.

 

개척하기 전에 저는 유학을 준비했었어요. 미국이나 호주에서 박사과정을 하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유학 갔다 오면 뭘 하지.’ 유학을 갔다 와도 제 기질상 개척할 것 같았어요. 유학 갔다 오면 6-7년이 걸릴 텐데 그럴 바에는 그 열정 가지고 개척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학을 포기하고 개척을 했어요.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는 개척을 준비하는 분들이나 신학생 분들이 현장에 너무 약하다고 봐요. 현장 감각이 너무 없지요. 저는 지금도 전도를 나가거든요. 제가 스케줄이 바쁘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예요. 거의 하루도 안 빼고 전도를 나가죠. 잠바입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뿐이지,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다고 성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꾸준히 전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이렇게 전도를 다니니까 저희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없이도 전도를 해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물어봅니다. “목사님, 그렇게 전도하면 목사님 전도해서 몇 명이나 왔어요?” 제가 전도해서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전도는 사람을 데리고 오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합니다. 운동 삼아 열심히 그냥 해요.

 

그리고 제가 교회 개척해서 지금까지 교회 문이 잠겼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새벽예배 끝나고 집에 들어갔다 7시 반이면 교회에 출근하지요. 항상 7시 반에 출근했고, 퇴근은 항상 9시 반 정도, 좀 늦으면 11시 정도였어요. 오전에는 늘 교회 내부적인 일들을 보거나 설교 준비 등을 하고 오후에 전도 다닌 게 많아요. 그렇게 7시 반에 교회 출근하는 것이 어디 제주도에 가는 일 같은 게 없으면 무너져 본 적이 없어요.

 

외부에 나가면 나름대로 재미있죠. 제가 선교사 출신이라 외부에 많이 알려진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여러 가지 중고등부, 청년부 연합 사역을 오래 했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활동하려면 굉장히 바쁘게 또 많은 메리트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봐요.

 

개척하면 한 달에 월세 50만원 내기 힘들만큼 재정이 어렵잖아요. 그런데 벽산그룹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김인득 회장님이 저를 굉장히 좋아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40만원을 주더라고요. 그리고 또 매주 말씀을 전해주면 안되겠냐고 연락이 온 거예요. 그 말을 듣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좋은 이유가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은 게 아니라 4 x 4 = 16 생각이 나서 좋은 거죠.

 

이런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우리 월세 해결되고, 우리 아내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먹고 살 수 있겠다. 그래서 제 아내랑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내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당신이 이렇게 하면 나에게는 좋지만 과연 우리가 이러려고 목회를 하느냐.”

 

이전에 저를 키워주신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소시장에서 소가 되면 안되지 않느냐.” 소시장의 소는 어디에 팔려 가냐, 돈 많이 주는 데 팔려가는 거라는 뜻이죠. 제가 만약 외부에 가서 말씀을 전해서 어떤 사례비를 가지고 와 교회를 운영하고 가족을 보살피면 성도들이 내는 만 원, 이만 원이 귀하지가 않아요.

 

개척교회는 정말 어렵게 운영되거든요. 상처받은 사람들, 불신자들이 오고, 그 사람들이 내는 만 원, 이만 원이 귀해요. 그래서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게, 내가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고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로 먹고 살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외부적인 사역들을 안 하려고 하죠.


      

5. 교회가 급격히 성장해 가면 가장 신경 써야 될 부분이 양육과 훈련, 그리고 공동체를 관리하는 시스템적 부분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수원은혜교회>의 양육과 훈련, 그리고 운영은 어떤 체계를 가지고 움직이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하진 않았지만 저희 교회는 가정교회 사역을 하고 있어요. 제가 가정교회라 한 것은 중국의 가정교회란 말을 본 따 온 거예요. 중국 선교지에 갔는데 거기는 가정교회라는 말을 쓰잖아요. 참 좋았어요. 중국 가정교회의 특징이 목사가 없고 리더만 있지요.

 

그래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구역, , 목장이라 하지 않고 가정교회란 이름을 썼어요. 가정교회라는 이름 아래 좀 큰 틀을 가지고 있어요. 가정교회 리더는 목사에게 오른팔, 왼팔과 같은 사람들이고, 가정교회 리더의 사명은 또다른 리더를 만드는 것과 가정교회 부흥을 시키는 것입니다. 숫자적인 부흥과 더불어 일꾼을 세우는 것을 리더가 맡아 지금도 계속 가정교회가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럼 가정교회가 인원수가 채워지면 어떻게 하지요?

 

잘라서 나누어지게 되죠. 인원수가 채워져서기보다는 리더가 세워지면 분리되는 것이죠. 공동체 안에서 인원이 좀 작더라도 저 사람은 리더하면 충분히 문제가 없겠다 싶으면 리더로 세웁니다. 제가 상담을 해보고 리더로 나갈 때 같이 할 사람 한 명을 붙여서 내보내지요.

 

리더교육은 가정교회 리더가 같이합니다. 제가 주일날 2시 반부터 3시 반까지 한 시간 리더교육을 하고, 수요일 저녁예배 끝나고 1시간 리더교육을 해서 AB팀 두 팀을 해요.


6. 교회 안에 청년 사역, 다음 세대를 위한 계획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저는 일단 중고등/청년 사역을 위해서 교육관을 확보했습니다. 중고등/청년 사역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큰 틀은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첫째는 담당교역자를 확보해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부교역자 한 사람이 다 감당을 하는데, 그래서는 전문성이 안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좀 무리가 되고 부담이 되어도 우리 전도사님, 우리 목사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교역자들이 있어야 된다고 봐요.

 

두 번째로는 자체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들을 위해 자체 공간을 확보해 줬어요. 그게 어려운 일인데, 저희 교회는 장애 아이들 때문에 시작되었지요. 주일 11시 예배를 드리면 장애 아이들이 같이 예배를 못 드려요. 다 뛰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그 공간을 확보했냐면 저희 교회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을 빌렸어요. 주변의 합기도장, 태권도장을 빌려서 한 달에 10만원씩 주고 공간을 활용했죠. 그런 곳들이 주일날은 쉬니까요.

 

처음에는 제 아내가 사역자로 들어가고 해서 시작한 패턴이 지금까지 유지가 되는 건데, 교회에 온 가족이 같이 왔다가 온 가족이 같이 가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일 11시 예배에 가족 모두 같이 와서 다른 부서로 다 흩어지는 거죠. 11시 동시에 영아부, 유치부, 초등부, 고등부, 청년부까지 모든 예배가 다 진행돼요.

 

스텝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겠네요.

 

보통 교역자들 5명과 교사들 70여명 정도가 1부 예배를 드리는데, 사역 전에 선()예배를 드려요. 11시에 공간마다 흩어져서 각 부서마다 섬기고 11시 예배를 마친 후 거기서 다같이 밥을 먹지요. 그러고 나서 모든 부서가 오후 프로그램을 다 돌리고 3시 정도에 끝나면 온가족이 다같이 집에 가는 거예요. 남아서 연습할 일 있는 사람들은 연습하는 식으로 되어 있지요.


 

  

7. 목사님의 삶의 스토리 - 가정, 목회자로 부르신 소명, 선교사 사역, 개척 사연 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두 살에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살았죠. 홀어머니에 남매로 자랐어요. 어머니가 늘 많이 아프셨고 5학년 때 재혼을 하셨는데, 그 아버지가 너무 좋으신 분이셨지만 술을 드시면 좀 달라지셨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부터는 말씀을 드려 허락을 받고 서울에 나와서 지냈어요. 외삼촌이 신문사에 계셔서 그곳에 있으며 신문배달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신문배달하고 학교에 갔다 오면 밤 11시가 되는 고등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모태부터 신앙생활을 했는데 고등학교 1, 2, 3년은 신앙생활을 못했어요. 힘들기도 하고 또 학교에서 주일날도 나오라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면서 제가 원하는 대학을 못가고 후기 대학을 가서 다니다가 CCC라는 곳을 만났지요. CCC에서 어릴 적부터 들었던 모든 신앙적인 지식이 전인적으로 되는 경험을 하고 CCC사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신학교를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당시 연세중앙교회 윤석천 목사님이 막 개척했을 때 그 교회를 다녔어요. 윤 목사님이 제가 신학교에 갔으면 좋겠다고 권면해 주셔서 자연스럽게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신학교 가서 좋은 목사님을 만나서 21살 때 빨리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제가 일반대학에서 1년 반밖에 안했지만 영어를 공부했거든요. 그리고 부모 없는 독자라서 6개월 복무를 했기에 남들보다 사역을 빨리 시작하게 된 거죠.

 

제가 처음에 유치부 전도사로 갔던 교회가 선교에 굉장히 열정이 많으셨어요. 그 목사님이 저를 비서처럼 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저에게 일을 맡기셨죠. 목사님이 자주 못가니까 제가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필리핀을 왔다 갔다 해서 어릴 적부터 선교지를 많이 다녔어요. 목사님이 설교하신 것을 제가 어줍지 않은 번역을 해가지고 필리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계속 다니면서 교회들을 돌보고 선교지 다니게 된 거죠. 목사님을 모시면서 그렇게 하다가 선교 다닌 것까지 해서 10년 정도를 필리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많이 아프게 됐거든요. 선교사 파송 받은 사람들은 다 똑같겠지만 선교지에서 죽어야 되나보다 생각했어요. 파송교회에서 한국에 들어오라고 하고 일단은 아프니까 들어왔지요. 검사를 해보니 제가 B형간염 항체가 없는 상태라 선교지에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교회에서 저를 파송 안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선교지를 못나가게 됐죠.

 

그러면서 유학 준비를 하다가 수원에 개척을 하게 된 겁니다. 저는 세상이 별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을 세워나가고 사람들을 살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게 참 좋아요.

 

8. 한국교회가 어렵습니다. <교회 신뢰도 하락> <사회구조적 문제> <포스트모던이즘> 등 한국교회가 시대의 조류 앞에 풍전등화라 할까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로서 한국교회 현실을 어떻게 보시며, 특별한 대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있어요. 국민은행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은행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하죠. 한국은행은 한국에 있는 은행을 위해 존재하잖아요.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위해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도를 해요. 그 방법이란 게 아직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어떤 것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저를 인도하실지 모르겠는데,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있어요.

 

저는 큰 그림을 가지고 움직이기보다 하나님이 열어주는 쪽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제가 했던 건 명절 때마다 이웃교회들에 선물을 주며 섬기고, 바른목회 아카데미란 곳에서 50-60명이 참석하시는 목사님들께 목회말씀을 해드리는 거예요. 요즘은 방송 사역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교회가 아직 빚도 많고 돈이 없어서 기독교방송 쪽은 섬길 여력이 없는데 C채널도 그렇고 CTS도 그렇고 나중에 여유 있으면 후원해 주시고 설교를 먼저 보내달라고 하셔서 감사하고 미안하지요.

 

목사님이 순수한 목회를 하시는데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며 아쉬운 점이 있으실까요?

 

최근 조계종 사태도 보았지만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원래 불교 용어거든요. 사판승은 행정을 책임지는 중이고, 이판승은 수도하는 중들이에요. 행정을 담당하는 중들과 도를 닦는 중들이 있는데 그래도 지금만큼 유지가 되는 건 이판승들 때문이라 생각해요.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전체를 어떻게 바꿀까 보다 나 한 사람이 경건한 목사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로 만들면 사람들이 보고 생각하는 바가 크겠죠. 그것이 한국교회를 섬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9. ()보듬자리를 운영하시고 계십니다. 어떤 사역들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또 이 사역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저희 교회에 장애 아이들이 있었잖아요.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모여서 장애아동이라고 하면 비하하는 말처럼 들리니까 특별아동 자립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어요.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갈 때가 없어요. 한국의 현실상 집에서만 있어야 하거든요.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교회안의 해당 되는 10가정 정도의 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모임이 활성화되어서 사단법인이 만들어진 거죠.

 

저희는 기본적으로 외부에 알리는 것을 잘 안 해요. 저는 장애인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 교회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사랑해요. 저는 우리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장애가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하나님이 내게 맡긴 영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장애인이라는 집단을 남달리 사랑하는 것은 아니고, 내게 맡긴 영혼을 잘 섬기고 싶어요. 그래서 사단법인 보듬자리를 운영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학교를 갔다 오면 저희 교회에서 돌보죠.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돌봅니다. 그리고 카페를 만들었고 우리 성도들이 자원봉사를 하며 거기서 나오는 모든 수익금을 적립해서 앞으로 이 아이들이 살 수 있는 보듬자리를 만드는 거죠. 카페가 활성화되면 그 아이들을 거기에 취업시킬 생각도 있습니다.




*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 인터뷰 / 목사월드 정 진 목사)


 * 황유석 목사님 프로필

- 개혁신학연구원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필리핀 선교사

- (사) 보듬자리 회장

- 바른목회아카데미 교수

- 수도침례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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