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다운 교회, 교인다운 교인이 그립다”

추천 : 0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6-10-17 11:20

교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 교회를 찾아볼 수 없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럼에도, “이것이 진짜 교회이다”, “이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마디로 성령을 도매금으로 방매하는 목회자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수백억원, 아니 수천억원을 들여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하고 있는데,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탑은 우뚝 솟아 있는데,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역사의 현장에 교회가 없다는 말로 들린다. 즉 이것은 복음을 헐값으로 뿌리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니 기독교인들은 한국교회의 모든 현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 정말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수없이 서 있는 첨탑, 수백억원, 아니 수천억원을 삼키면서 버티고 있는 예배당의 건물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일까? 그곳에 다니는 교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묻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교회이다. 이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계실까?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타락한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 교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깃들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가시밭 길과 벼랑 끝을 헤매셨는데, 또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지금 그 분은 어디에 계실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역경은, 오늘 타락해가고 있는 교회에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예수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 행동하지 않는 교회를 보면, 옳은 말이 아닌 것 같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가 가는 그곳에 교회도 간다고 말해야 옳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맑고 깨끗한 마음과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탐욕으로 가득한 충혈된 눈으로, 허위의식으로 가려워진 눈으로는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기 위해서 역사의 흐르는 물줄기에 귀를 기울이고, 에수님이 활동하신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라. 시끄러운 소음소리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현존하시면서,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 한신대학교 박재순 교수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예민한 청각을 가지라”고 했다.

교회마다 시끄럽다. 그것은 교인과 교인, 목회자와 교인, 교회와 교회, 교단내부와 연합단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청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을 신으로 만들어버린 교회의 강단에서 연일 ‘돈의 소리’만 들려온다. 심지어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고 말한다. 타락한 중세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심지어 ‘영적’이란 이름아래 목회자가 교인들을 성폭행하는 등 교회 안에서 윤리적인 타락이 하루가 멀다고,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더 이상 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차마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기가 힘들다. 또한 교권주의와 교파주의, 그리고 집단이기주의에 만연된 나머지 분열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단이 무려 300여개가 넘는다는 것은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희망을 걸지 않는 이유도 바로 교회가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성서에 나오는 1달란트의 받은 종의 모습이 아닌가? 성경 마태복음 25장 22절부터 30절의 말씀은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이 성경구절은 말해 주고 있다.

달란트 비유나, 열처녀 비유는 모두 하나님나라와 대심판에 대한 이야기이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집 없는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고 심판이 내려진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가 이들을 위해서 얼마만큼 활동을 했는지, 되묻고 싶다. 이들을 멀리하면서,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갇힌 자, 병신, 떠돌이, 노숙자, 거지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나몰라 하고 있다.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가 나누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의 비유를 들며, 너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처음 전파된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본질을 잃어버린 채 홀로 모든 것을 독식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교회는 주여! 주여! 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과 등진 교회가 되었다. 예수님의 하나님운동과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전혀 다르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것은 한국교회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입맛에 따라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는 경쟁에 열을 올렸고, 호화로운 교회당의 실내장식을 하는데 바빴다. 그리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떠안은 빚을 갚기 위해 중세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듯이, 교인들을 향해 믿음의 척도를 헌금액수,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뱉는다. 싸구려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 안에 하나님 대신 맘몬신과 바벨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중세교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 일에 전혀 참여하지를 못하고 있다. 아니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참여하지를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결단해야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공동체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성서는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1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행동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을 회피하며, 세상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으로 믿고, 불의한 사회와 잘못된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변명이다. 아니 허구이다.

박재순 박사는 “하나님의 전능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희망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전능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에 답하는 시대적 사명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현재에 안주하며, 자신이 속한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더 충실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죽음의 세력에 의해 우리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우리의 이웃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이것이 보수신앙인가?

행동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허구적인 신앙에 빠져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바쁘다. 이제 교회는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하나님은 성전의 하나님, 예수님도 성전의 예수님으로 바뀌어졌다. 그렇다 보니 교회 안에서는 연일 목회자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고 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연합단체를 둘러싼 법정다툼, 교단을 둘러싼 다툼 등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에 있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연합단체가 크게 둘로 쪼개지고, 그것도 모자라 해마다 “합친다, 만다”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진리와 신앙을 지키고만 있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수적인 목회자들의 추상적인 복음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는, 타락한 중세교회보다도 못한 길을 걷고 있다.

성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 재물을 잃는 것과 같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자기가족을 위해, 자기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준 달란트를 다 허비하는 사람과 교회는 하늘의 가족을 잃는다고 했다. 교리나 전통적 신앙만을 붙잡고 안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삶은 비록 삶이 고달프고, 위험할 지라도, 용기 있게 예수님과 하나님나라를 향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논두렁, 서울역, 노동현장, 떠돌이, 다문화가정 등의 속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진정 화해와 해방의 복음이라면, 그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깊은 남북분단을 극복하는 복음이어야 한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붕 위에 있지 않고, 가장 적대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남북분단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교회이며,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하고,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적게 행동하려고 하는 등 행동 없는 삶에 빠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행동해야 한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그들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들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기독교한국신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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