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가치 잃은 세상, 어린 생명 죽음으로 내몰아

추천 : 0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7-05-02 13:50

지구촌 곳곳서 어른들의 욕망에 의한 아동 인권유린 심각

 

전 세계 곳곳에서 아동들의 인권유린 사태가 심각한 수준이다. 수백만의 아동들이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한참 학교에 다닐 나이인데도 한 끼를 연명하기 위해 작업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야기된 전쟁은 아직 채 꽃도 피어보지 못한 어린 새싹들의 영혼과 육신까지도 잔인하게 짓밟고 있다. 마치 아동에게는 처음부터 ‘인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각종 폭력, 노동착취, 성폭력 등 악한 손길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렇게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어른들의 세상으로부터 작고 연약한 우리 미래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죽임을 당하는 우리의 미래

예수그리스도는 분명 천국은 아이들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예수의 향기를 전혀 풍기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전쟁이 없는 세상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세상, 부모와 함께 건강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흐르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아무것도 원치 않고, 오직 가족과 함께하겠다는 그들의 작은 바람조차 묵살해 버린다.
 
어린이는 인격적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며, 차별받지 않고, 균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또한 건강하게 성장해야 하며,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 덧붙여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즐겁고 유익한 문화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동의 권리다. 그러나 이들의 권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온통 이기심으로 가득한 어른들로 인해 자신들의 권리는커녕, 생명조차 담보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곳곳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접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멀리 IS가 창궐한 시리아 등지에서의 아이들의 인권은 더욱 처참하다. IS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들의 입장과 반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있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부모를 잃고 생면부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여겨 폭력을 일삼고 있다. 더욱이 IS를 막고자 서방 국가에서 자행한 폭격으로 인해 도리어 아이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시리아 내전 속에서 아이들이 당한 고통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전기고문, 손톱 뽑기, 매질 등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고, 심지어 인간방패 노릇도 했다. 지옥과도 같은 곳을 탈출해 망망대해를 건너던 중 배가 전복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그대로 수장됐으며, 이들 중 아이들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한다. 시리아 내전으로 삶을 갈망하다가 유럽으로 이주하던 중 지중해에서 배가 난파되어 터키 보드룸의 해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쿠르디 아일란 사건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시커먼 바다는 그들에게 ‘희망’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안겨주며 오늘도 그들을 바다 속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필리핀 쓰레기 마을에서의 아이들 인권도 바닥을 치고 있다. 주민들 대부분이 쓰레기 더미를 뒤져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이들도 부모를 도와 온종일 쓰레기를 뒤지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빛나는데 이곳은 온갖 쓰레기로 산을 이루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처한 환경이 어떤 것인지도, 자신의 몸이 병에 든 것도 모른 채, 그저 쓰레기를 한 겹 한 겹 뒤지기에 전심을 다한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각 나라에서는 누구보다 존귀하게 보호를 받아야할 아이들, 즉 우리의 미래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며, ‘피의 절규’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절규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묻히고 만다.

 

  
 

“아이들, 그 자체로도 존귀하고 존경 받아야 할 대상”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린 아동학대…국가 미래 포기한 처사

어린이 주일을 맞았지만 작금의 세상 속 우리 아이들은 계속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들의 ‘피의 절규’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고사리 같은 손은 짓뭉개져, 따가운 빛을 가리기에도 벅차다. 하지만 누구하나 이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이들의 고통과 절규를 들어주지 않는다. 평화·존엄·관용·자유·평등·연대의 정신 속에서 양육되어야 함에도 도리어 물건 취급 받으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실 어린이들의 인권이 처음부터 내팽개쳐지진 않았다. 1959년 11월에는 국제연합 제14차 총회에선 전문 및 10개 조로 되어 있는 아동의 권리를 선언한 ‘국제연합아동권리선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는 앞서 국제연맹이 1924년 제네바에서 채택한 5개 조로 된 ‘제네바 어린이 권리선언’을 1948년 7개 조문으로 개정했다가, 1959년 완벽한 권리 선언문으로 채택해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이 선언은 인류의 생명과 문화를 파괴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을 담아 전 세계가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마음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는 곧 ‘아동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그 출생 전후부터 법적 보호는 물론, 이를 여러모로 잘 보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권리보장의 국제적 승인이었다. 아동을 인권의 주체로 인정하고 아동의 최선이익을 실현하겠다는 국제적 의지의 표현이자, 모든 아동들은 권리적 존재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10개 조를 살펴보면 △인종, 종교, 태생 또는 성별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및 사회적으로 발달하기 위한 기회를 가질 권리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 △적절한 영양, 주거, 의료 등의 혜택을 누릴 권리 △심신장애 어린이는 특별한 치료와 교육 및 보살핌을 받을 권리 △애정과 도덕적 물질적 보장이 있는 환경 아래서 양육될 권리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 놀이와 여가 시간을 가질 권리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제일 먼저 보호받고 구조될 권리 △학대, 방임,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인간 상호간 우정, 평화 및 형제애 정신으로 양육될 권리 등이다.

이러한 국제적 선언이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오늘 아이들은 아무런 권리를 누리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이들은 왜 처참하게 인권이 짓밟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가장 근접한 답은 바로 철저한 개인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원인이 된다. 물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마저도 내팽개친 채 그들의 꿈인 성공(재물)만을 쫓는다. 그 가운데 자신들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 든다. 이는 비단 한 인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시스템과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가장 연약하고 자기 방어가 미흡한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아동학대 등의 각종 범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참조 본지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에게서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 보도)

 

인간의 탈을 쓴 늑대의 참극

모두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었던 ‘원영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아동에 대한 인권의 현실을 고스란히 전달해 준다. 공개수배까지 하면서 원영이 찾기에 온 나라가 들썩였지만, 결국 작디작은 아이는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왔다. 뉴스에선 국민들의 ‘제발 살아만 돌아와 달라’는 바람과 달리 아이가 암매장 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안타까운 것은 원영이의 죽음은 고작 소변을 좌변기에 흘렸다는 이유였다. 계모는 원영이가 소변을 좌변기에 흘렸다는 이유로 때리고 화장실에 가뒀다. 아이가 반항하고 나오려고 하자 화장실 청소솔로 더욱 가혹하게 때렸다. 3개월 동안 가둬놓으면서 하루 한 끼를 주면서 대변을 못 가렸다는 이유로 몸에 락스를 뿌리기까지 했다.

친부도 자신의 아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재혼한 계모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방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부부는 아이가 죽은 뒤에도 뻔뻔하게 아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까지 자행했다.

비단 원영이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제2, 제3의 원영이는 넘쳐났다. 인천에선 아버지에게 학대받다 맨발로 탈출한 11세 소녀 사건일 알려졌고, 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장기결석 학생 및 미취학 아동을 전수조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한 명의 학대 받는 아이로 인해 또 다른 학대 받는 아이가 괴물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전수조사가 시작되면서 밝혀진 사건들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부천의 20대 부부는 부부싸움을 하거나 짜증이 날 때 화풀이 대상으로 태어난 지 3개월도 안된 딸을 택했고, 이 아이는 생후 1개월쯤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45일 동안 지속적으로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2차례 고의적으로 땅 바닥에 떨어뜨려졌으며, 아이의 엄마는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딸이 학대를 당하는 사실을 방임하기에 이르렀다. 부모가 스스로 아이를 저버린 것이다.

또한 부천의 한 아버지는 자신의 여중생 딸을 때려죽인 뒤 무려 1년간 시신을 방치하기도 했다. 이 아버지는 목회자에 모 신학대학교의 교수로 밝혀지기도 해 한국사회뿐 아니라, 한국교회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충북 청주에서 30대 부부가 5년 전 딸(당시 4세)을 욕조에 가두고 학대하다 숨지자 시신을 암매장한 사건이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이밖에도 초등생 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훼손해 3년간 냉동보관해온 부모가 구속 기소되고, 경남 고성서 5년 전 딸을 폭행해 숨지게 한 뒤 야산에 암매장한 비정한 엄마가 구속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엄마가 재혼을 하려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스터미널에 몰래 버리고 도주했다가 붙잡힌 일도 있었다. 하늘이 맺어준 부모 자녀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 버린 슬프고 가슴 아픈 일들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충격의 사건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모두가 경제적 문제이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버렸기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이다.

 

미래의 자원, 아껴주고 보살펴야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러한 끔찍한 뉴스만 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순 없다. 더 이상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처럼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후회해봤자 늦는다. 법적인 조항을 마련하는 수순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아동은 철저하게 인권을 보호해야할 대상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살펴본 국제연합아동권리선언 10개조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아이들이 더 이상 인종과 종교, 성별로 차별을 받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다고 폭력을 가하거나 죽음 당하지 않도록 하나의 소중한 생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더불어 모든 아이들이 어릴 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 살기 어려운 나라일수록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은 더욱 미약한 경우가 다반사다. 때문에 가난이 대물림되고, 사회적 인식도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온전히 교육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오늘에 있어 아이들이 각종 전쟁과 재난으로부터 제일 먼저 보호되고 구조될 권리를 명확하게 세워야 한다. 솔직히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은 없다. 아이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가장 우선 되어야할 것은 물론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만, 적어도 전쟁터에서 아이들을 볼모로 땅따먹기 싸움을 벌이는 것은 가장 잔인하고도 비인간적인 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도 존귀하고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단순히 연약한 존재라고 치부하기에는 장차 이 나라, 나아가 전 세계를 이끌어갈 미래 자원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향한 무차별한 폭력을 눈감아 주는 것은 스스로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린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인권을 되찾고, 그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미래를 향한 꿈을 활짝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이 서로 협력해 해야 할 과제이다. 이는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도 아니고, 어느 단체만이 짐을 지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동참해야 해결될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후보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어떠한 공약보다도 장차 이 나라의 재목이 될 아이들을 위한 공약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미래를 모르는 후보에게는 당장 이 나라의 앞날도 맡길 수 없다. 당장 코앞에 닥친 유권자들의 표심만을 구하지 말고, 훗날 유권자가 될 아이들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는 대통령. 그들에게 밝은 미래를 안겨 줄 대통령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기독교한국신문 발췌>

 

핫클립

  • . 등록된 뉴스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