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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4 추천 0 비추천 0 2017-07-23 00:05 작성자 : 전규성

"이유를 불문하고, 누구이든, 사도바울의 신앙사상에 반하거나,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하는 것을

전하면 저주받는 다른 복음입니다."


갈 1:7-9.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여목을 논할 수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아래는 최갑종 교수 님이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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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여성

-여성 안수문제를 중심으로-

최갑종(백석대학교 총장, 바울신학전공)


1. 서론

기독교가 태동된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사회는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이 팽배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였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종교,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남성이 주도하였으며, 여성들은 이들 영역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여성들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남성들보다 하위급에 속한 자로 간주되어 성차별이 당연시되었으며, 남성이 있는 대중 앞에 나설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거리를 나설 때는 얼굴조차 함부로 노출하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운동이 시작되면서 남성위주의 헬라-로마-유대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여성들을 찾아갔고, 여성들을 만났으며, 여성들에게 이적을 베풀었고, 여성의 질병을 고쳐주셨으며, 그들을 자신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시켰으며, 그들을 부활의 첫 증인들로 삼았다. 예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운동을 헬라-로마사회에까지 확장시킨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이 있을 수 없다”(갈 3:26-29),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면서, 당시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을 초기 기독교운동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였으며, 여성들을 교회의 지도자나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 여성에 대한 예수와 바울의 자세와 가르침을 그 당대사회구조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놀랍고 혁명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는 초기 시절부터 당대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를 뛰어 넘어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인격으로 간주하였으며, 여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구원의 은총과 은사와 교회의 제반사역에 있어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남성들과 함께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으며,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말씀을 가르쳤다. 하지만,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구조가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어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차별의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시킴으로 인해 가정과 교회에 무질서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와 선교의 장애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경우에는 그들의 자유가 일시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고전 14:34-35 딤전 2:11-15). 그렇지만 남녀의 동등한 인격과 역할을 지향하고 있는 기독교복음자체가 축소되거나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복음은 가는 곳마다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기인식과 자유와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오늘의 평등과 민주사회가 형성되기까지 기독교의 지대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사회만 하더라도 일백여년 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근세기 한국 기독교지도자들은, 당시 유교의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선교사들과 함께 여성을 교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여성을 교육시키고 개화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이화학당, 호수돈 여고, 정신여고, 배재학당 등은 여성 교육과 여성 지도자 배출의 산실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남녀평등과 여성들의 인권이 법으로 보장되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교육, 예술 등 사회전반에 걸쳐 여성들의 진출과 활동은 과히 놀랄만하다. 여성과학자, 교수, 정치인, 기업인, 기술자, 교사, 군인, 의사, 법조인 등 남성이 관여하는 모든 영역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여성 장관, 여성 국회의원은 물론,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초기의 한국교회가, 주후 1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의 인권과 자유와 역할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사회보다 항상 앞장을 섰었던 것에 반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 한국사회를 선도해가고 있기보다도, 오히려 사회보다 뒤떨어져 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예를 들면, 여성목사와 장로직분)를 비롯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문제이다.

여성의 성직 안수문제는 이미 지난 반세기 이후부터 한국 기독교 안에서 가장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어떤 교단 교회들은 이 기간 동안 교단의 금기사항으로 간주되어 왔던 여성안수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한 반면에, 어떤 교단 교회들은 여성안수문제를 교단의 신학 및 정체성과 결부시켜 계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왜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문제를 두고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안수문제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더욱 확대하려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성의 안수 문제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고 하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까지도, 똑같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초대 기독교 공동체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이든, 찬성하는 교단이든,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다 같이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의 신학적 근거를 주로 바울서신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수들은 고린도전서 11:3의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가리키는 본문, 고린도전서 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가르침, 디모데전서 2:12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가르침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는 교수들은, 갈라디아서 3:28의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하나이라는 가르침, 고린도전서 11:1-12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가르침, 바울이 자신의 선교와 목회현장에 브리스길라, 뵈뵈, 순두게 등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참여시킨 점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동일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을 두고 이처럼 서로 상반된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 자체가 이중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동일한 공동체나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가? 만일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주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도 바울의 교회 안에서 여성 위치와 역할에 관한 주요 가르침을 헬라-로마-유대사회의 문맥과 관련하여 살펴봄으로써,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토론되어 온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 문제, 특별히 여성의 성직안수문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있다.

어떠한 연구도 전제와 방법론 없이 시작할 수는 없다. 여성의 안수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접근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둘째, 바울의 서신들은,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았던 저자가, 그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독특하고 개별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을 향해 예배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한 교훈이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한 교훈이나,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아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부탁이나, 빌레몬에게 “나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라”는 부탁 등은,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살던 사람들이나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들 본문들은 “서로 사랑하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는 본문처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직접 적용되어야 하는 규범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셋째, 바울 서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해석자가 자신의 어떤 주장을 전제한 다음, 특정한 본문에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가서 그 본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본문으로부터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본래 의도나 메시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특정한 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 본문의 상황적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2. 바울의 콘텍스트(context)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 사회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신약성경,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에 살고 있는 헬라-로마-유대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초대 기독교와 신약성경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수와 바울도 유대인으로 출생하여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문화의 틀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였으며, 동일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예수와 바울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1) 헬라 사회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 있어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자유롭게 관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여성은 이와 같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주로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들이 공회에 참석하여 투표를 하거나 말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주전 4세기의 아덴에서 여자들은 자신의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했다. 심지어 처녀는 결혼하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만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 그는 바로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는 경우, 그 여자는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되어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리고 결혼 한 후에는 자기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일체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정숙한 여자들의 경우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서든 집을 나설 때 따라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이 참석한 파티장소에 동행하여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다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면서 생활하여야 했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여야 했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여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서도 외부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으로 불리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주전 4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폴로도루스(apollodorus)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그 당시 사회 구조가 얼마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남성]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젊은 여인들과, 매일 매일 몸을 돌보아 줄 하녀들과, 그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가사 일을 맡길 수 있는 아내를 두고 있다.” 일종의 고급 창녀로 불리어질 수 있는 ‘젊은 여인들’은 남자들의 저녁 파티에 참석하여 남자들을 시중들고 성적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이러한 파티에 아내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하녀들은 집안에서 주인 남자와 주인 여자를 시중들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가사 일을 담당하였으며, 그리고 아내들은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남편의 부재중에도 집안에서 가사 일을 전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체 말을 하지 않아야만 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혹은 여성]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자, 특별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고 있을 경우,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여자나 창녀로 취급될 수 있었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여자가 밖에서 묻거나 말을 하고 싶을 경우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하여 말을 하여야 하며, 직접 밖에서 말을 하는 경우 그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것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2세기 초엽에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은 거리를 나설 때 얼굴은 물론 몸 전체를 가리고 나서는 여인들을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정숙한 여인으로 칭찬을 하고 있다. 이처럼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인들의 언행은 자신들은 물론 자기 남편들의 수치/체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게도니야의 여성들은, 우리가 사도행전 16:14-15과 빌립보서 4:2-3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렸으며, 집안일은 물론 장사를 포함하여 시의 관리나 중요한 민중제사와 국가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종들이나 여자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들을 대신하여 외부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기 남편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난한 농부들의 아내들에게도 이와 같은 규범들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자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자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다.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거의 사라진다. 여 사제들은 남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모든 여성들은,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기도와 제사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 사제들은 국가적인 제사를 직접 집전하였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하였다. 그래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가운데 종교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자들도 있었다.


(2) 로마 사회

고대 로마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은 헬라사회의 여성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사는 여성들은 자기 남편들과 함께 극장과 서커스단에 갈 수도 있었고, 남편들과 함께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여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있었고, 서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자유롭게 시장에 갈 수도 있었고, 신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신전을 찾아가거나 야외공연장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교육받은 상류층의 여인들은 자기 가족들이 아닌 남자들과 지적인 담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 밖에 부동산을 세를 주거나 사고팔기도 하였고, 시(市)의 여사제나 고급관리인이 될 수도 있었고, 유력한 정치인의 후원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법정에 나가 자신들에 관한 문제를 청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전통과 관습을 따라야만 하는 대다수의 일반 여성들은 헬라 사회의 여성들처럼 남성에게 의존적이었으며, 그들의 활동도 남성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들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나 시민권자가 될 수 없었다.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덕목 중의 하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었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 대한 복종이었다. 따라서 로마 사회의 여성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아버지와 남편이 사망하는 것도 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상실로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자기 딸의 결혼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고, 남편은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전적인 헬라사회의 여인들처럼 로마사회에서도 정숙한 여자들은 집안에서 가사 일을 하고, 남편의 재산과 하인들을 관리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헬라의 여성들처럼 집을 나설 때는 자신들의 정숙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설사 여인들 중에 사회적인 활동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주로 남편들의 힘이나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때때로 여자들도 시(市)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은 할 수 있었지만, 여자들의 자리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도 제일 마지막에 배정되었다. 물론 시골의 여인들이나 여 노예들은 헬라의 경우처럼 남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헬라의 여성들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지 못했다. 사실상 종교의 영역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그들이 시민사회에서의 영역에서 누렸던 자유와 비교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제한을 받았다. 헬라의 여성들과 달리 로마의 여성들은 종교적 영역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여인들은, 심지어 여 사제들도, 동물들을 도살하여 드리는 희생제사에의 참여가 배제되었다. 간혹 모든 여성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종교축제들이 열리곤 했지만 여성들의 축제에서는 짐승의 희생제사가 배제되었다. 그러나 헬라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로마의 종교에서도 헬라종교에서처럼 여 사제들과 여신들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3) 유대 사회

바울 당대 유대 여인들도 헬라-로마의 여인들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헬라 여인들처럼 유대 여성들이 철저히 가정 일에만 매여 있지는 않았지만, 로마 여인들만큼 자유를 누리지는 못했다. 마카비 문서(4 macc 18:6-7)에 따르면, 정숙한 유대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자신이 결혼하기 전까지 집 외부 출입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순수한 처녀의 상태로 있었음을 깨우쳐 주어야만 했다. 헬라-로마사회에서처럼 유대 사회에서도 자신의 아내가 대중 앞에 얼굴을 노출하였을 경우 그 남편은 그 여자와 이혼하여야만 했다. 유대 여인들은, 집안에서는 안주인 역할을 하였지만,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었으며, 율법 공부와 하루 세 번씩의 공식적인 기도와 정결 의무도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을 뿐, 여자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유대 여인들도 헬라-로마의 여인들처럼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의무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출산하여 양육하고 남편을 대신해서 가사 일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가 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여 매일의 기도에서 이 일을 하나님께 감사하곤 하였다. 유대 여인들이 집안에서 담당하여야 할 가사 일은 밀을 갈고, 요리를 하고, 빨래와 의복을 만드는 일 등이었다. 이 밖에 여인들은 남편을 위해 잠자리를 준비하여야 하며, 남편에게 매력적이어야만 했다. 이와 비례해서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 음식과 의복을 공급하여야만 했고, 규칙적인 부부생활의 의무를 감당하여야만 했다.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 대체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존중되었지만, 그러나 남자들은 결혼생활 중에도 자신의 아내 이외의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나, 여자들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일세기의 헬라-로마 사회에서 이혼의 권리는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주어졌으나 유대 사회에서는 남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주전 180년 경 시락에 의해 기록된 지혜서에 따르면, 당대 유대사회에서 여인들은 두 종류로, (1) 착하고, 복종적이고, 겸손하고, 금욕적인 여성과 (2) 악하고, 비복종적이고, 부끄러움이 없고,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여인으로 나누어졌다(9:3-4, 6-7). 아내 역시 두 종류로, 즉 착한 아내와 악한 여자로 나누어졌다. 착한 아내는 이해심이 깊고, 조용하고, 금욕적이고, 겸손하고, 어질고, 집안일을 잘 돌보고, 자기 남편을 존경하고, 행복하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지혜로운 자로 나타나는 여인이다(25:8 26:1-4, 13-18, 26). 이런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복 받은 자이며, “최상의 소유물”을 가진 자이다. 반면에 사악한 여인을 만난 자는 마치 전갈을 만난 자와 같다(26:7). 이런 여인에게는 권세를 주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한 멀리하여야 한다(25:26). 죄가 여자[이브]로부터 들어왔고, 여자로부터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여자는 본성적으로 악에 빠질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시락서는 아내들을 둘로 나눌 뿐만 아니라 또한 딸들도 둘로 나눈다: 영리하고 겸손한 딸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에게 보화가 되지만(22:4), 거만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딸은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수치가 된다(22:5 42:11). 이처럼 시락서에 따르면, 착한 아내와 영리한 딸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남자의 권위를 도전하는 자가 아니라, 항상 모든 면에서 남자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이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복종은, 근본적으로 남자가 여자 위에 있다는 유대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울 당대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유대인 철학자이며, 구약 성경을 헬라 철학, 특별히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사상의 범주로 해석한 사람인 필로도, 헬라-로마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여성관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사회의 사상적, 종교적 체계의 바탕을 제공하였던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적인 사상 구조에 따라,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자로 분류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덜 지성적이며, 남자보다 더 쉽게 유혹을 받으며, 도덕적으로도 남자보다 열등하다. 따라서 여자는 가사 일에, 반면에 남자는 사회나 국가 일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낮은 영역에 속한 자이며, 남자는 여자보다 더 높은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아내는 마땅히 그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하지만, 필로도 플라톤의 사상 구조에 따라, 여자가 특별한 경우에 남자와 같이 됨으로써 자신의 열등성을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자가 더 높은 영역, 곧 남자의 영역에 속하기 위하여서는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하여야만 한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성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난 다음에도 남아서 기도에 전념하여야 하며, 감각적이고 육적인 여자의 영역을 벗어나서 영적인 영역인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힘써야 한다. 이처럼 필로는 전형적인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상구조에 따라 높고, 적극적이고, 이성적이고, 영적인 높은 영역과 낮고, 소극적이고 육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나누어 전자는 남자의 영역으로, 반면에 후자는 여자의 영역으로 분류한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여자의 역할은 더 제한되었다. 여성들에게는 결코 사제직이 허용되지 않았다. 쿰란에서 발견된 성전문서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여인들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까지 제한을 받아 여인의 뜰 이상을 넘어갈 수 없었다. 2세기의 자료에 따르면(미쉬나, 탈무드), 회당 예배에서 여자들은 리더가 될 수 없었으며,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일도 금지되었다. 회당예배에서 일반 여성들의 역할은 그저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었다. 물론 헬라-로마 사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디아스포라 여성들 중에 회당 운영의 재정적인 후원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하여 가끔 성경봉독이나 권면도 할 수 있었다.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이런 여성들을 가리켜, “장로,” “회당의 어머니,” “리더,” “회당의 수장”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팔레스틴 본토의 여성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허용되지 않았다.


(4)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

고대-헬라-로마 유대사회로부터 복음서가 보여주고 있는 예수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면 여성의 위치와 역할과 관련하여 일종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태도를 보면, 당시 유대사회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가르침과는 놀랄만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당대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에게는 토오라의 공개적인 가르침과 선포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예수는 각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선포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도래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고 선언하시면서, 여성을 단순히 성적 대상인 아닌 남자와 동등한 인격으로 보아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소외와 멸시를 받고 있던 세리와 죄인들과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에게 주어질 것을 선언하셨다(마 11:19 눅 7:34-50).

예수는 자기 당대 유대 랍비들과 달리 남성들과 똑같이 여성들을 찾아갔고,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를 하였고, 그들을 대상으로 이적과 치유를 베풀었다(막 12:40 13:17). 예수 당대 사회에서 남자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자를 만나거나 대화를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예수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예수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각각 5천명과 4천명을 먹인 이적에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시켰으며(마 14:21 15:38),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과(눅 7:11-17), 회당장의 딸(막 5:35-43)을 살리셨으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셨다(막 5:25-34). 이방여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셨다(막 7:24-30). 메시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을 처녀들로 묘사할 만큼 예수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마 25:1-13). 예수는 이혼문제에 있어서 남녀의 동등권을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당시 여성에게 불리했던 이혼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천명하셨다(막 10:11-12 마 19:9).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처형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을 구하셨다(요 8:3-11).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초청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마리아에게 직접 말씀을 가르쳤고(눅 10:38-42), 그들의 오빠가 병들어 죽었을 때 직접 무덤까지 찾아가서 다시 살리셨다(요 11:1-44). 그리고 자신의 발에 기름을 부은 마리아의 봉사를 비판하는 가룟 유다를 향해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옹호하셨으며(요12:1-8),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 헌금을 그 어떤 헌금보다도 기한 것으로 칭찬하셨다(막 12:41-44).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치 않는 사마리아 여인을 직접 만나 가르쳤고, 그 사마리아 여인을 사마리아선교의 증인으로 삼았다(요 4:39-42). 예수는 여성들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제자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 여러 여인들을 자신의 선교사역에 동참시켰으며(눅 8:2-3), 이들을 12제자보다 넓은 제자의 범주에는 포함시켰다(마 12:49-50). 사실상 12제자와 함께 예수님을 따랐던 이와 같은 여인들의 헌신 봉사가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의 순회선교 사역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남자들로 구성된 12제자들은 예수가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배반하고 모두 도망갔지만, 이들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를 따라가서 예수 곁을 지켰다(요 18:15-18 25-27 19:25-27).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자도 이들 여인들이었고(막 14:3-9), 예수의 처형현장을 지켰던 자들도 이들 여성들이었고(요 19:25-27), 예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자들도 여성들이었고(막 15:47 16:1), 그리고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알린 자들도 이들 여성들이었다(막 16:5-8 마 28:8-9). 당대 유대사회에서 여성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실로 여성을 자신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눅 24:1-10). 바로 이 여성들이 예수의 승천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행 1:14). 우리가 예수를 당시 유대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한 사회혁명가로 볼 수는 없지만, 여성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인 자세와 교훈은 예수 당대 그 어떤 유대 랍비들의 교훈과 언행으로부터도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예수의 여성에 대한 적극적인 교훈과 언행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3. 바울의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들

예수 이후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철저한 바리새파 출신의 유대교 학자로서 초기 기독교운동을 강력하게 반대한 박해자였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회심하여 기독교복음을 열심히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목회하다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으며,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해 지중해 연안의 각 지역을 다니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들 교회에 목회적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들이 신약성경의 중요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알기 위해서는 여성과 관련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 반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안수 논의는, 주로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된 바울의 가르침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은 자기 당대 주후 1세기의 가부장적 사회 문화 구조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과감하게 남성의 영역에 까지 확대한 일종의 여성 해방론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은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 당대의 헬라-로마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와 유대교의 유산에 따라 교회와 가정은 물론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여전히 여성의 위치와 활동영역을 제한하고 여성을 남성에게 복종시킨 자인가? 동일한 바울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왜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제시되고 있는가?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반된 주장이 제시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바울은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들을 접근하고 해석하는 학자들의 선입견과 해석의 차이 때문인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바울 서신을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다양하다. 어떤 교훈들은 마치 상반되거나 서로 모순과 긴장을 가지고 있는 교훈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35과 디모데전서 2:10,11 등에서는 교회에서 여자들이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강하게 금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1:3-10에서 바울은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머리됨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5:22-24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7:1-7에서는 부부생활의 동등성을, 고린도전서 11:11-12, 갈라디아서 3:28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동등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와 목회사역에 나타나 있는 여러 여성 사역자들, 이를테면, 바울 자신이 자기의 동역자로 부른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의 브리스가(롬 16:3), 겐거리아교회의 목회자로 간주되는 뵈뵈(롬16:1), 빌립보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의 멍에를 함께 진 유오디아와 순두게(빌 4:2-3),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도자 눔바(골 4:15)등은, 바울이 이미 그의 선교와 목회사역에 여성사역자들을 적극적으로 동참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롬 16:1-12). 아마도 당시 남성이 여성을 접근하기가 힘든 사회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이 선교사역을 하면서 이들 여성사역자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바울을 대신하여 남녀로 구성된 가정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간 지도자역할을 감당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바울 서신에 나타나 있는 이와 같은 다양한 교훈들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전자의 교훈만을 보고 후자의 교훈을 보지 못한다면, 바울을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여성관을 강하게 견지한 자로 볼 수 있는 반면에, 또 반대로 후자만을 보고 전자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바울을 주후 1세기의 여성해방론자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이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성 있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특정한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아 바울은 이렇다, 저렇다고 쉽게 단정을 내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중에 누가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의 본문에 근거하여,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임직 등을 포함하여 여성의 역할을 가급적 제한하려고 시도하려 한다면, 그는 바울이 그 어떤 서신에서보다도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체계적으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로마서에서는 왜 그와 같은 교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지를,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여성에 대한 그와 같은 강한 부정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지를, 왜 바울이 로마서 16장과 갈라디아서 3:28, 고린도전서 7장과 11장 10-11에서 주안에서 남녀의 동등성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반대로 누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임직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여성의 역할을 확대하려고 한다면, 그는 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서 교회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본문들이 주어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황은 물론 이러한 본문들이 위치하고 있는 전후 문맥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요청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왜 디모데전서 2장에서, 그와 같은 교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본문을 오늘 우리교회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논란이 되고 있는 몇몇 핵심적인 본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4. 본문 주석

여성의 안수문제와 관련해서 바울 서신에서 주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본문은, 여성 안수반대자들이 성경적 근거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1:2-16, 고린도전서 14:34-35, 디모데전서 2:8-15과, 여성 안수 지지자들이 성경적 근거로 삼는 갈라디아서 3:28, 고린도전서 11:11-12과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여성사역자들에 관한 본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 본문에 대한 간략한 주석을 먼저 제시하고자 한다.


(1) 고린도전서 11:2-16

고린도전서 11:2-16의 본문은 공 예배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차이가 있다거나, 교회 안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 계급에 속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은 남자나 여자가 예배에 참여하여 다 같이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지만(14:23, 26, 29절 참조)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당대 사회나 문화에 비추어 수치스럽지 않는 적절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참석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즉 여자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긴 머리를, 반면에 남자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이 남자는 여자의 지배자(“ruler”)라는 것을 뜻하는지, 남자는 여자의 근원(“source”)임을 뜻하는지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 안수 반대자들은 전자를, 여성 안수 지지자들은 후자를 지지하고 있지만, 본문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종속관계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머리”라는 말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남녀가 다 같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주안에서 남자나 여자는 서로 동등하다는 것과, 다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근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로부터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우선권이나 지배권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바울이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서 남녀가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여자 교우들이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 정숙한 여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헤어스타일까지도 포기하고, 남자와 같은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져 여자의 신분을 떠나 남성화함으로써, 예배의 정숙성과 질서를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 스타일, 복장문제 등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전체가 지역사회로부터 부끄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공예배시에 남자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에 참여하려고 하였는가?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기 전까지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의 이원론적인 여성관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당시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 남성들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한 신분을 벗어나서 남성처럼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영적인 신분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플라톤의 사상도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고린도 여성들 중에 신전에 헌신한 여자들은 남성화된 것으로 간주되어, 남자들처럼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쓰지 않는 관습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다수(多數)를 접하고 있었던 이들 여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인 차이도, 종과 자유인의 신분상의 차이도 없이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다는 자유의 복음을 받았을 때(갈 3:28 4:4-7 고전 12:13 고후 5:17), 그리고 그 복음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살고 있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 구조를 뛰어넘어 모든 면에서 남자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통해 헬라 여인들의 최고 이상인 남성과 같은 영적인 존재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공예배시에 여성들의 표시인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을 거부하고, 남자들과 꼭 같이 짧은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와 예언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여성들이 바울의 복음과 성령 체험을 헬라의 플라톤적 이원론의 구조에 따라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려 할 때, 그래서 그들의 행동이 당시의 사회구조나 문화에서 부끄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16을 통해 이를 시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고린도 여성 교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행동 배후에 있는 동기일 것이다. 즉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여 지켜져야 할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주신 여자의 신분 그 자체를 외면하고 남자와 같이 되려고 하는 비 복음적인 동기와 그로 인한 교회 공동체의 수치와 선교장애 때문일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4:34-35

바울은 고린도전서 14:34-35의 핵심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성경구절로 제시한다. 반면에 여성의 성직안수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설명하는데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2004년 『목회와 신학』지에 여성안수문제와 관련된 글이 여러 차례에 걸쳐 실렸었는데, 고린도전서 14:34-35의 해석문제는 늘 논쟁의 한 축을 차지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인권확대와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미국 풀러 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는 같은 책 5월호에 실린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pp. 56-71)와 11월호에 실린 “서창원 목사의 ‘여성안수 허용문제에 대한 이의 제기’에 답함”(pp. 186-199)에서 사본학적인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34-35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함으로써 아킬레스건을 피해갔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4-35이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사본학적인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들을 볼 때 그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사본학적인 증거들은 34-35이 본문의 진정성(眞正性)을 옹호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없고, 그 대신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무런 조건을 제시함 없이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 5절과 39절에서 여자들이 예배시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뿐만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한 여러 여성 지도자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브리스가, 뵈뵈, 순두게, 유니아, 눔바 등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체 말하지 않아야 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이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또한 이 구절로부터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인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아서도 아니 된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선을 긋거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조건 없이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이 구절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여 성도들, 특별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으로 보고자 한다. 바울이 여기서 여성 일반 전체를 두고 말하고 있기보다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로마-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영역은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28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이 고린도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이와 같은 바울의 복음은 특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사회와 가정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고, 부부생활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을 때(고전 7:2-6), 그들 중에 일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여의 차이는 물론 결혼과 부부생활까지 거부하고,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하여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꼭 같이 행동하려는 극단적인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즉 그들에 의해 가정과 교회에서, 특별히 가정 교회의 공예배 때에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바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에게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고,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34-35의 본문을, 바울이 모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집으로 떠날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규범적인 명령으로 주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머리 문제나 입맞춤의 문제처럼 특수한 문화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교회 예배 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 몇몇 기혼 여 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전후 문맥에서 계속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교회 예배의 질서이다. 그는 14:34-35의 본문 앞에 예배 질서에 대한 교훈을 주는 문단을 두고 있다. 즉 문단이 시작하는 14:26에서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문단이 끝나는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예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아무리 예배시에 어떤 개인에게 찬송과 말씀과 계시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교회 회중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그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할 때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으며(14:27-28), 자신에게 계시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졌으면 그는 잠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14:30). 그런 다음 그 구체적인 실례로써 교회에서 여자들이 잠잠하여야 할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면서 14장을 종결한다.

바울이 14:34-35에서 교회에서 여 성도들, 특별히 결혼한 여 성도들은 공예배시에 잠잠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공예배의 질서는 물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여성들은 자신들의 성령 체험을 통해서 자신들은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남녀의 역할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들로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고린도교인들이 교회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이러한 교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나 그밖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 동일한 교훈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공예배시에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 성도들이 전혀 교회 질서를 혼란하게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들을 향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바울이 마치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무조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14:35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부터, 공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결혼한 여 성도들이라는 것과, 이들이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놓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남자 교우들)에게 질문을 제기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집에서 자기 남편과 더불어 사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것을, 교회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남편을 다 같이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본문에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하여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선행 문단이 방언과 예언과 계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아마도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 혹은 계시, 혹은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을 때 이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서 질문들을 던진 것 같다. 바울이 여 성도들이 제기한 질문은 자신들의 남편들에게 물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보아 방언, 예언, 계시보다도 오히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들의 질문은,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배 중에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어떤 무식한 여교우가 주제 넘는 질문을 던져 예배를 방해하는 일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여야 할 것은 예배 중에, 왜 남자들이 아닌, 여인들이 질문을 제기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 점을 보아, 우리는 적어도 이들 여교우들의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여인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그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유대여인들은 남자들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되어 있었다. 유대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헬라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의 교육도 일반적으로 여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고대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오늘 현대사회의 여성들과 달리 남자들에 비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 성도들이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그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여인들이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가정에서 자신들의 남편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여 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는 가정에 돌아가서 자신들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서 볼 때, 교회 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만큼 자신은 물론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하여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여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추어져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한편으로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의 동등성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신자들이 살고 있는 당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때는, 그래서 가정과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될 때는 그 자유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안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3) 디모데전서 2:12-15

바울은 디모데전서 2:12-15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12절의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의 정확한 문법적인 의미는 바울이 언제 어디서든 항구적으로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현재 능동태 직설법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여성 일반 전체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정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기혼여성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여성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 “구내”가 일반적으로 기혼여성을 가리키고 있으며(딛 1:6 딤전 3:2,12 5:19),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를 등장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혼여성에게 직접 관련된 해산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왜 에베소교회의 기혼여성들에게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울 것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가? 본문에 대한 일종의 거울독법(mirror-reading)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서처럼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에게도 어떤 문제들이 있었으며, 그래서 바울이 이와 같은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에게 있었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임을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여 성도들로 하여금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도록 할 것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에베소교회의 여성들 가운데 거짓된 교훈에 빠져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를 잘못 가르치려고 하거나 남자를 주관하려는 자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에 거짓된 교훈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타나고 있고(딤전 1:3-7, 19-20 4:1-3 6:3-5,20), 그리고 여자에 대한 교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도행전 19:28-37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에베소 지역의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여신 아데미 제식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에베소교회의 기혼 여성들이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여자는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울 것과 남자를 가르치는 일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사실이, 여자가 남자 일반 전체에게 일절 순종하여야 하는 것과 남자를 일체 가르치거나 주관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결혼한 여성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편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교훈의 근거로서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를 실례로 들고, 해산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직접적인 대상이 일반여성 전체나 일반남성 전체를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결혼한 여성, 혹은 과부가 된 여성이, 마치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그릇되게 아담을 인도한 것처럼, 잘못된 교훈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가르치려고 하거나 주관하려고 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바울이 여기서 여자들은 남자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경우에서처럼,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남자를 가르치고 지도한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에베소교회 여성도들 중에, 고린도교회의 여성도들처럼, 복음이 가져다 준 자유를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운 부부관계의 질서까지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자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과 교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났고, 급기야 이 문제는 교회의 당면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바울이 볼 때 이들 여 성도들이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남편이나 다른 남자들을 잘못 가르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기 남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남편보다 이해력과 판단력이 더 정확하였으며, 그래서 선한 목적으로 자기 남편이나 다른 남자의 이해를 도와주려고 시도하였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바울이 이들의 행동을 잘못된 행동으로 금지하였을까? 바울이 12절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한 다음, 13절 이하에서 이유 접속사와 함께 구약 창세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담이 아닌 여자 이브가 꾀임을 받고 죄에 빠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당시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이, 마치 이브가 아담을 가르칠 위치와 능력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먼저 유혹을 받아 아담을 죄에 빠지게 한 것처럼,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가르칠 위치와 능력도 받지 못했으면서도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본문이 에베소교회 여 성도들 중에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교육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남편이나 다른 남자를 그릇된 길로 오도하려고 하는 여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디모데전서 2:12-15의 본문을 에베소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여 성도들에게도 바울이 그와 꼭 같이 적용을 시켜서,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할 것이다.


(4) 갈라디아서 3:28

갈라디아 3:28은 갈라디아서 3장의 결론적인 구절인 동시에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를 천명하는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바울 당대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세 가지 장벽, 곧 인종적, 신분적, 성적(性的) 장벽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복음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온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해소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동등권을 회복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옛 사회나 문화의 구조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의 구조(갈 6:15, 고후 5:17)에서 서로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구절이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의 관계를 포함하여 남녀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져다주는 본문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구원문제에 있어서 바울이 인종적, 신분적, 성적 장벽과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물론 구원문제가 이 본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수직적 관계에만 국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새로운 수평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영혼 구원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신분과 삶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하는 전인적(全人的)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갈라디아교회의 근본 문제는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의 삶의 정체성과 삶의 스타일인 율법, 할례, 유대인의 절기, 음식법 등을 따를 것을 요구한 데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요구를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과 장벽을 철폐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 단적인 실례가 갈라디아서 2:11-21에 나타나 있는 안디옥사건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 교회였던 안디옥교회에서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음식 먹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공중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안디옥 사건은 복음은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남녀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차원에서만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데 한정되지 않고, 남녀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제거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소한 음식 먹는 문제를 포함하여, 이방인에게 그 어떤 불리한 조건을 가져다주는 일체의 차별을 없애는 전반적인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여성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여하한 차별도 배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가져다주는 복음의 축복과 은사들을 남녀가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옛 언약시대에서도 복음의 축복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임이 약속되어졌으며, 그 실례로 몇몇 이방인이 이미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긴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옛 언약시대에서는 구원의 축복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오심을 통하여 새 언약 시대가 도래 한 이후 유대인에게 한정되었던 장벽이 철폐되고 모든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복음의 축복이 제시되었다(마 28:18-20 행 1:8 롬 1:16-17). 그리하여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었던 마지막 때, 새 시대, 새로운 창조가 실현되게 되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주심의 축복이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시대에 있어서 성령주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선물이 아니고 왕, 선지자, 제사장 등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다(민 11:17 27:18 삿 14:6 삼상 11:6 16:13 사 42:1-2 59:21 61:1). 그러나 구약성경 자체가 마지막 때에 이 성령의 축복이 인종과 신분과 성의 장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요엘 2: 28-29이다: “그때에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누가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행 2:16-21). 요엘이 성령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준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누가는 사도행전 2:18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 추가하여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사실은 성령의 선물과 그 은사면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갈라디아서 3:28은 사실상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바의 성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 3:28의 근거를 갈라디아 교인들이 남녀의 차별 없이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실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갈 3:2-5 3:13-14). 이 구절은 사실상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옛 사회나 문화의 구조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의 구조(갈 6:15, 고후 5:17)에서 서로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제거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소한 음식 먹는 문제를 포함하여, 이방인에게 그 어떤 불리한 조건을 가져다주는 일체의 차별을 없애는 전반적인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복음은 여성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여하한 차별도 배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가져다주는 복음의 축복과 은사들을 남녀가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5)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여성 사역자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16:1-2에서 그는 겐거리아교회의 일꾼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하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뵈뵈가 여성인 점은 뵈뵈를 가리켜 “우리 자매”라고 부르고 이는 점에서 분명하다. 우리말로 뵈뵈에게 붙여진 “겐거리아 교회의 일꾼”이란 호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말 “디아코노스”는 일꾼(servant), 조력자(helper), 집사(deacon), 사역자(minister)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디아코노스”라는 호칭을 “사역자”가 아닌 “집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 집사는 오늘 우리 교회에서 통용되는 집사는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일곱 집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데반, 빌립 등 일곱 집사들은, 헬라인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단순히 봉사의 직무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도직 사역도 하였다. 바울은 이 말을 자신의 호칭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전 3:5 고후 3:6 6:4 11:23 엡 3:7 골 1:23-25). 뵈뵈가 일반인이 아닌 바울과 같은 목회자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말 성경에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가 본문에서 여성명사가 아닌 특수한 사역자를 지칭하는 남성명사로 사용된 점에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1세기 말엽에 익나티우스(ignatius) 감독은 그의 필라델피아 서신에서 이 말을 교회의 대표자를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다(10:1 11:1). 따라서 뵈뵈를 동일한 명칭이 붙여진 남성사역자들과 구별하여야 할 언어학적, 신학적 이유가 없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뵈뵈를 겐거리아 교회의 대표자나 목회자로 간주해도 결코 무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고대 사회에서 편지의 전달자는, 때때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발신자를 대신하여 편지의 내용까지 설명해 주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편지 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보낼 때 뵈뵈를 자신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선정하였다고 하는 것은, 뵈뵈가 로마서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 목회적 훈련을 받았거나 아니면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준비하는 특별한 사명을 맡겼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 16:3-5에서 브리스가와 그녀의 남편 아굴라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브리스가를 그녀의 남편보다 먼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브리스가가 자기 남편인 아굴라보다도 더 적극적인 혹은 더 중요한 사역을 하였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바울이 브리스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와(롬 16:20), 디도(고후 8:23)에게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브리스가가 사실상 바울과 함께 전도, 가르침, 설교, 예언 등의 복음 사역자로 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들의 가정에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는 점은(롬 16:5 고전 16:19) 사실상 브리스가가 목회사역을 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누가가 사도행전 18:26절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로가 아블로를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는 사실도 브리스가가 복음전파 및 목회사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바울은 로마서 16:7에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부부관계에 있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 부부가 다 같이 “사도”로 호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말 개역판 성경은 “저희는 사도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이들 부부가 사도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헬라어 본문은 분명히 이들이 사도들 중에 탁월한 자들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러 영어 번역 성경도 이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들 부부를 사도로 보아야 한다는 점은 바울이 바로 이어 이들이 자신보다 먼저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아마도 그들은 12사도 반열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사도급 인물이겠다. 그들은 본래 사도들처럼 많은 교회에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여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회심 연대를 주후 32-34년경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미 예수 생전에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며,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참여한 120명의 성도들 중에 포함되었거나,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500여 성도들 중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한 사도라는 말이 열두 사도보다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행 14:4,14 고전 12:28 엡 4:11 살전 2:7). 그렇다고 해서 이 사도라는 호칭은 일반 신자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복음전파 사역에 동참하는 전문적인 사역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여성인 유니아가 평신도가 아닌 사도라는 특별한 직책을 가진 자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이 구절이 여성의 안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고 하더라도, 초대교회 안에 이미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 여성 사역자가 있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바울 당대 헬라-로마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접촉하기가 힘들었던 사회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부부선교사는 때때로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5. 주석의 적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의 서신에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와 관련하여 소극적인 교훈과 적극적인 교훈 등 양면의 교훈이 있다. 그렇지만 여성의 성직 안수를 직접적으로 부인하거나 찬성하고 있는 본문은 없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직안수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하든, 찬성하든, 그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그것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에 근거하기보다 여러 성경 구절로부터 유추해 낸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해석학적인 귀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해석학적 귀결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신약성경은 어느 쪽을 더 지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

나는 관련된 본문의 주석에 근거하여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이 여성의 성직안수를 지지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해석보다 설득력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여성 안수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11:2-15, 고전 14:34-36, 디모데전서 2:8-15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가 여성의 성직안수를 반대하는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이들 교훈으로부터 바울이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을 유추해 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에게 예배에서 이미 기도나 예언에 참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러 여성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되거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고전 11:2-15, 고전 14:34-36, 딤전 2:8-15의 본문들을 여성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하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함은 물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가져오고 있는 자들에게 준 바울의 특별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들 구절들을, 예배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혹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처럼(롬 16:16 고전 16:20절),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에 비추어 해석하여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날 적용시키려하지 않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사실상 오늘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들은 일체 중지되어야 한다. 교회는 여성가대원, 여주일학교교사, 여전도사들을 일체 세우지 않아야 할 것이며, 신학교는 여신학도를 입학시키지 않아야 함은 물론, 목사 후보생을 가르쳐야 하는 여성신학교수들을 세워서도 아니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하여야 하며,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말하지 말고 잠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교훈을, ‘여자들은 예배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처럼, 오늘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시켜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우리가 이들 구절들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서도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으로부터 예배시에 여자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으로부터 성도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고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부터도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은, 마치 우리가 어떤 성경구절은 시대와 문화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곡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예수의 메시야적 인격과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해석학적인 관점과 함께 우리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어떤 특수한 서신의 구절들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점에서는 바울의 문제이라기보다도,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필자는 바울신학을 제시하면서 전체 바울신학을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이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의 기독론과 성령론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였고, 죄로 오염되었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이전으로 복귀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6:15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 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갈라디아서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아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사실상 바울은 그의 목회와 선교사역에 있어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새 창조는 “아직” 기다리고만 있어야하는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비록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옛 창조의 관점이 아닌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은 비단 사도 바울만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저자와 계시록저자와 히브리서저자로부터도 동일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구약에서는 모든 제사직분이 남성인 제사장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제사직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남자나 여자의 구분 없이 이제 모든 사람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저자도 “우리[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계 1:5, 5:10),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다”(계 20:6)라고 말하고 있으며, 역시 베드로전서 저자도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12: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할 때도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전제하고 있다. 루터를 위시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강한 부정적인 교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 역시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새 창조세계)와 “아직”(옛 창조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때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부부생활과 결혼까지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해 있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 교회의 선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여성교우들에게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원리적으로 여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유보되거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관련된 교훈과 “아직”과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가 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시하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과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28절, 고후 5:17절, 고린도전서 12:13절의 긍정적 본문에 비추어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수적 교훈이 보편적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가 왼편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의 헬라-로마-유대의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하여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앞서 나갔다고 한다면, 이미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사회보다 “아직” 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6. 결론

우리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지난 90년 대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로 부각되었던 여성안수문제를 취급하였다. 이 글의 목적은 여성 안수와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은 여성안수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된 우리의 연구는 바울의 서신 안에 여성과 그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양면의 교훈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들은 여성안수문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사실 바울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시기가 주후 46년에서 주후 65년까지였고, 그의 서신들도 이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다면, 바울의 교회들은 제도적으로 아직 충분하게 정착되어 있지 않은 개척교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바울 자신과 그의 교회들이 서 있었던 당시 사회문화와 구조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다. 따라서 바울 자신과 그의 교회에서 있어서 여성안수는 전혀 이슈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슈가 될 상황도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바울의 교회 안에 여성에 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안수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바울의 서신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본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자신의 주장만이 성경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주장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매도하거나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 논문이 여성의 안수문제에 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 글은, 한편으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했던 내용들이 편협 되거나 부적절한 성경해석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밝힘과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 바울의 서신들은 바울의 교회 안에 여성의 사역자와 지도자를 세움을 받아 활동한 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여성안수의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적어도 타락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남자와 여자를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똑같은 사명과 책임을 주셨다(창 1:26-28 2:18-25).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등 관계가 시작되고,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구조가 형성된 것은 어디까지나 창세기 3장 이후의 타락에 기인한다. 그럼으로 남자와 여자의 갈등과 여성의 성차별 등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죄의 문제와 함께 극복되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새 창조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단순히 창세기 1-2장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새 창조는, 비록 그 완성은 미래적이라 할지라도, 창세기 1,2장의 첫 창조보다 더 새롭고 더 우월하고, 더 완전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창조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첫 창조 안에서의 관계보다 더 새롭고, 더 우월하고, 더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첫 창조 안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완적이고, 서로 동등하였고, 서로 협력적이었다고 한다면, 새 창조 안에서는 더 그러하여야 함이 당연하다. 오늘 날 교회 안에서 직분과 그 사역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할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이미 새 창조사역의 동반자로 세워졌다. 새 창조 사역의 원천으로 보내진 성령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성령은 남자든 여자든 교회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그를 세웠고,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 그렇다면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죄와 타락으로부터 온 모든 남녀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모든 문제를 혁명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혁명적인 방법의 동원은 오히려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깨뜨릴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의 평화와 덕에 걸림돌이 될 경우에는 참고 기다리는 자세도 필요하다. 물론 이 말이 교회가 노상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만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새 창조사역은 이미 시작되었고, 계속 확산되어야 하고, 그리고 완성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현으로서 이 새 창조사역을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여성의 성직안수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법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오히려 사회를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는 이 땅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이 없는 새 창조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갑종 ?gabsamchoi@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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