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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구조로본 종말론 이해
조회 130 추천 0 비추천 0 2017-08-16 15:14 작성자 : 윤목사

요한계시록의 구조로 본 종말론 이해

 

오늘날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요한계시록에 대해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수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견강부회하여 이상을,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서론

 

우리 주변에 성경에 대한 오해와 오용이 흔한 것 같다.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요한계시록에 대해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수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이상한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단이 아닌 이들도 요한계시록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일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하게 외치고 싶다. “제발 요한계시록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요한계시록에 관한 대표적인 오해들

 

요한계시록에 대한 많은 오해들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역시 세대주의적 종말에 관한 것이다(세대주의적 오해). 19세기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세대주의 이론으로 보면, 새로운(근래에 몇몇 사람들이 새롭게 주장하기 시작하지만, 미국과 한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있을 대환난을 중심으로 한다. 세대주의자 성도들은 대환난을 피해 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17절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한 세대주의적 휴거(rapture) 개념이다. 대환난 시기에 어느 시점에서 휴거가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환난전휴거설’(pre-tribulation theory), ‘환란중간휴거설’(mid-tribulation theory)로 나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휴거되느냐에 따라 ‘(성도)전체휴거설부분휴거설로 나눈다. 이것은 세대주의자들 간에도 논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17절 말씀의 전후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름대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 논란일 뿐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논란을 벌여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런 논란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세대주의적 휴거설과 종말론의 영향 아래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 있어야 한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 한국 교회에서 많이 읽혔던 휴거라는 책의 내용은 성도들이 부분적으로 여러 번 휴거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것은 세대주의적 이해에도 미치는 못하는 이상한 이해(오해)를 더욱 유포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 나머지 성경이 올바로 제시하고 있는 바를 떠나 이상한 논란을 벌이며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데 문제가 있다.

 

세대주의자들의 이해와 달리,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에 대한 증언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2:10). 성도들은 수고하며 환란과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6:9~11, 12:11, 13:10, 18:24). 이처럼 성도들의 인애와 믿음이 강조된다(13:10, 14:12). 성도들은 지극히 큰 환난 중에 나오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에 의존하며 그 결과로 자신들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7:14, 6:11, 19:8). 이와 같이 참 성도들은 환난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 하나님에 의해 지켜진다(24:21~22 참조).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다르게 성도들에게 잘못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세대주의적 오해와 상당히 깊이 연관된 것이지만, 요한계시록의 말들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정확히 말해,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입견으로 본문에 접근)하는 바람에 나타나는 이상한 오해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하늘의 성도(天上聖徒)들은 문자적으로 하늘에서 흰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와 같은 말씀이 오해의 대표적인 예다. 그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피에 씻은 옷은 붉어진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속의 공로로 죄 문제를 해결하여 깨끗케 하심을 받았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그저 인상주의적 독서에 근거해 하늘 성도들이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바로 이런 오해로 인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제시한 주님의 재림 시기에 대비해 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기도하던 모습을 우리는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더구나 바르게 이해된 마지막에 일어날 일을 근거로 해서 성도들은 죽은 후에 부활할 때까지 그 영혼들이 하늘(heaven)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상태에서 문자적으로 옷을 입고 있기는 어려운 것이다.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것은 영혼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98절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도들의 출현과 관련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또 하늘이 황금 길로 이뤄져 있다는 일반적인 이해도 바로 이런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것은 요한계시록 2121절이다. 이 말씀도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면 하늘 길은 정금이다라고 단순히 단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 표현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돼 있다. 새 예루살렘의 성과 길을 그와 같이 묘사한 것이다(21:18, 21).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는 독특한 표현이 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다른 것임을 시사한다. 더구나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게 되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 중에 나타나고 있다.

 

모든 건전한 주석가들은 새 예루살렘이 신·구약의 교회 성도들에 대한 표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게 되는 실제적인 성의 모습에 대한 묘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으로 하늘을 유추하고, 현재 하늘의 길이 정금으로 이뤄져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더구나 18절과 21절은 거기에 있게 될 신·구약의 교회 즉 신·구약의 성도들을 거룩한 새 예루살렘성으로 표현하면서 그들의 온전함을 말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3년 반(12:14), 3일 반(11:9, 11), 42(11:2 13:5), 1,260(11:3 12:6)과 같은 용어들도 문자적인 해석으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그것들은 유대인들에게 극심한 고난으로 기억되던 엘리야 시대의 3년 반(왕상 17-18)과 관련해 나온 극심한 고난의 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유대인이라면 모두 극심한 고통의 기간이라고 생각하는 기간을 사용해 그런 고통의 때가 있을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지, 문자적으로 3년 반 즉 42달 즉 1,260일 동안 있을 어떤 일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용어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하는 일이다.

 

문자적 해석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또 하나는 요한계시록 1318절에 나오는 짐승의 수 666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은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표현인데, 이를 바코드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근래에 나온 매우 이상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오해들을 떠나서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현재 그리스도의 왕이심과 최후 승리자이심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는 귀한 말씀으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윌리엄 헨드릭슨이 자신의 주석 표제로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세상적 승리자 그 이상의 분이시다(more than conquerors). 귀한 말씀인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두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있지만, 그 둘은 모두 적법한 이해들이다. 그리고 그 해석 중에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될 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달라지게 된다. 그 두 해석은 모두 정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성도들은 잘 살펴보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두 가지 해석이란 (1)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될 일을 차서적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해석

 

(2)요한계시록은 점진적 병행법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해석이다.

 

이에 대해 차례대로 생각해 보자.

 

요한 계시록은 앞으로 될 일을 차서적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해석

 

요한계시록 2~3장을 어느 시기의 교회에 대한 묘사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라진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다면, 4~5장은 하늘 궁정의 예배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장면에서 나타나는 두루마리 책의 일곱 인()을 떼는 것과 관련된 말씀(6~7), 일곱째 인을 때실 때 하늘이 반시 동안 고요한 후에 일곱 천사의 일곱 나팔 부는 일(8~14), 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한 계시(15~18), 재림 묘사(19), 천년 왕국에 대한 말씀(20),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21~22)을 모두 차서적으로 보는 해석이다. 6장 이후에 나타난 모든 말씀들은 앞으로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차서적 묘사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일어날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말씀이 된다(6~18).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이 지나간 후에 있을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묘사가 19장에 기록돼 있다. 191~5절에서 앞의 말씀과 연결하면서 그 배경을 묘사하고, 196~10절에서 재림에 대한 선언과 찬양을 기록하고 있다. 재림주의 모습은 1911~16절에 묘사돼 있고, 1917~2절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본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 후에 천년 왕국이 있을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20:1~6).

 

따라서 이런 해석은 19장과 20장의 흐름을 차서적으로 보는 것이다. 19장에 재림이 묘사돼 있고, 그 후에 천년 왕국에 대한 언급과 묘사가 있으니, 천년 전에 재림설(전천년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에선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다. 이런 해석을 역사적 전천년설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19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대주의의 전천년설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성도들을 위한 은밀한 재림’(secret coming)과 성도들과 함께 오는 파루시아’(parousia)라는 두 국면이 있고. 그 사이에 7년 환란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던 역사적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 국면으로 나눠 설명한 일이 없다. 또한 요한계시록 19장도 그런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19장과 20장을 차서적으로 봐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한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단선적 이해에 근거한 해석으로 봐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점진적 병행법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해석

 

그러나 이런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즉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과연 요한계시록 19장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612~17절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특히 77~17절에 기록된 구속 받은 사람들에 관한 묘사도 213~4절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같은 정황을 여러 번 묘사한 예를 살피면서 병행법적 구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115~18절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시사가 있고, 1414~20절에서도 시사하고 있다. 1617~2, 1917~21, 2011~15, 218절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에 대해 해석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다음과 같은 7개 병행법적 구조(seven parallel structure)로 구성돼 있다고 보고 제시한다.

 

(1)일곱 촛대 사이의 그리스도(1:3~3:22)

 

(2)하늘과 일곱 인()에 대한 이상(4:1~7:17)

 

(3)일곱 나팔에 대한 이상(8:1~11:19)

 

(4)핍박하는 용에 대한 이상(12:1~14:20)

 

(5)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한 이상(15:1~16:21)

 

(6)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이상(17:1~19:21)

 

(7)극치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이상(20:1~22:21)

 

즉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7개 병행법적 구조를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를 생각하면, 19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묘사된 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20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년 왕국은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림부터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소위 무천년설 즉 교회 시대에 천년 왕국 사상이 나타난다. 무천년설이란 천년 왕국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때부터 이미 천년 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병행법적 해석에 근거한 이해이다.

 

두 해석 사이의 열매 있는 대화와 성도들의 자세

 

두 가지 해석 즉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서로 대립하면서 결국 둘 다 옳지 않는 해석이 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어느 해석이 옳은 것이지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러나 두 해석에 맞서는 다른 해석들과 달리, 어느 해석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선택 가능성의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와 대화는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이나 열등한 해석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존중하면서 같이 서 있도록 하는 논의를 갖게 만든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요한계시록 204절에서 살아서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전후 문맥 속에서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장점이 있고, 차서적 이해에선 자연스러운 결과를 지닌 것이 된다.

 

천년 왕국 상태에서 성도들은 부활체를 갖고 영원히 살고, 다른 성원들은 오래 살지만 죽기도 하는 것이 난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말씀에 대한 신실함을 나타나는 해석이다. 이에 비해 무천년적 해석은 성경 전체의 구조와 잘 조화되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여러 번 나타나는 것과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역사적 전천년주의자이고 무천년주의자인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19장과 20장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열매 있는 논의(fruitful discussion)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입장으로 어떤 해석이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더 잘 반영하는지에 관해 논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해석이 요한계시록을 주신 주님의 의도를 더 잘 드러내는지 논의하고, 어떤 해석이 성경 전체의 구조에 더욱 일치하는지 논의하며, 어느 해석이 성경 전체의 사상을 더 잘 반영하는지 논의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단자나 이상한 성경 해석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의도를 주의해 살펴보도록 하는 해석적 작업으로 인도해 더욱 깊이 있는 해석자들이 되게 한다.

 

이런 논의는 우리를 더욱 살찌우고,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에 더욱 민감하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의도에 충실하게 만들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바와 내가 속히 오리라”(22:7, 20)는 말씀에 의존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열망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논의를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비록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결론

 

요한계시록에 대한 구조 이해를 통해 그동안 있어 온 오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면서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을 요청한다.

 

첫째, 신약적 종말 이해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사자의 임하심 또는 하나님 자신의 종국적 임하심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게 될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될 여호와의 큰 날 중심으로 종말을 말해 왔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적 두 세대 개념에 따르면, 이 세대(this age)가 끝나게 되고 오는 세대(the age to come)가 동터 올 때 이 세대의 종말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인해 구약적 종말 개념에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신약적 종말 개념이 된다. 그 개념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주심으로 인해 그와 같이 종말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but not yet)와 같은 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신약 성도들은 자신들이 이미 종말에 속해 있음을 알고, 자신들에게 임한 종말론적 질서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이미 종말 안에 있지만, 언제가 세상 끝이 있게 될 것(13:40, 49)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 오직 세상 끝만을 종말이라고 생각하던 식의 구약적 의식과 용어 사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신약의 저자들은 종말이라는 말을 구약의 저자들과 같이 최후의 심판을 중심으로 사용하지 않고, 새롭게 변화된 종말 개념을 반영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역하시고 가르치신 때가 이 모든 날들의 마지막종말이라고 한다(1:2). 베드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부어 주신 성령님의 임재가 말세에있게 될 일의 성취라고 하면서, 요엘서의 그 후에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변경해 신약적 종말 의식에 충실히 표현해 주었다(2:17). 또 요한도 마지막으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자기 시대의 수많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1세기가 마지막 때라고 단언했다(요일 2:18).

 

이와 같은 용어들은 그들이 자기 시대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신약적 종말 개념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종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마치 구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최후의 심판을 중심으로 이 세대의 끝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가져다주신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질서 즉 종말론적 질서 속에 편입돼 있음을 충분히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터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consummation)에 이르게 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 몸의 부활을 소망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적 종말 개념에 충실한 성도의 모습이고 종말론적 실존의 모습이다.

 

둘째,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 성도들은 죽으면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heaven) 또는 낙원’(paradise)에 있게 됨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죽음 이후 상태를 마치 몸을 가진 상태로 과장하거나 그때 이미 상이 있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유업의 상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딤후 4:6~8, 벧전 5:4 참조). 성도들은 하늘에서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이다(14:13).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더해져 그 수가 차기까지, 즉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이르기까지 잠시 쉬면서기도도 하고(6:9~10) 찬양도 하며(4:10~11, 5:8~10),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기다린다.

 

한국 교회는 이와 같은 하늘에서 상태가 최종 상태인 것으로 오해하고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이 많이 퍼져 있다. 그러나 성도들이 낙원과 하늘에 있는 것은 기다리는 상태다. 최종 상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에 이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이고, 그것은 영원 상태(eternal state)를 말한다. 이와 반대로 근래에 성도들이 기다리며 있게 되는 하늘상태를 부인하는 사조가 서구에서 유입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구체적으로 그려 주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과 이해를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들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2:9).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실재가 분명히 전달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성도들이 최후로 바라는 것은 부활한 몸으로 참예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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