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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경론
조회 217 추천 0 비추천 0 2018-04-19 15:01 작성자 : 칼비니즘

칼빈의 성경론



서 론



  성경관은 신학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관점은 그의 사상과 믿음과 삶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경 이해의 주관주의에 치우치는 자유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는 올바른 성경 관을 갖도록 함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여 칼빈주의 성경 관을 연구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와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서 칼빈주의 성경 관을 밝히고자 한다.



본 론



1) 객관적 계시(객관적 계시)로서의 성경


  현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성경에 대한 근본적 태도는 동일한 부분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는 성경에 대한 무오성(무오성)을 부정하는 것과 계시의 주관성(주관성)만을 강조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단순히 책으로서의 성경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구별짓는 요소는 인간의 반응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르트와 부룬너는 완성되어 이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강조하기를,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창조적으로 사람에게서 소원된 응답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계시의 말씀은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해졌으며 또한 여전히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지속적(continuos) 혹은 아마도 더욱 낫게는 반복(frequentative)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계시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결코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객체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계시의 객관적 존재를 부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계시자체와 계시의 증거를 구분 짓는다. 그러나 16세기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에서 영구적인 형태로 주어졌다고 하였다 . 그리하여 칼빈주의 교회는 성경의 객관성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주관적 요소를 동시에 강조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의 제 1절은 성경의 객관성을 그 성경의 "기록 됨"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때에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후에는 진리를 더욱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이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가 더욱 공고히 서고 더욱 더 위로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것들을 온전하게 기록하시기를 기뻐하시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기록을 가장 필요하게 만들었으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장 제5절에는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온전성에 대한 수납과 확신의 주관적인 면을 고백하고 있다.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권위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그 말씀으로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달려 있는 것이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


  이렇게 개혁 교회는 성경의 객관성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주관성을 동시에 주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성경의 객관성은 오늘날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신적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자유주의적 주관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탈 성경적 행태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객관성의 강조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방패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광란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비난하여 말하기를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서,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 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고 반문하며 성경의 객관적 계시를 떠나 주관주의의 환상에 빠져있는 자들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전래 2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사실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신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혼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 말씀을 외면하고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경향과, 또한 다른 편에 배타적인 강조점을 두면서 성령의 역사를 간과하는 지성(지성) 정통주의적인 합리주의 경향을 목도하면서 올바른 방향설정에 대한 상황적 요청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자계시(자계시)는 본질상 말씀계시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계시에 속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계시에는 말씀계시뿐만 아니라 사건계시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나 특별계시는 양자가 다 객관적 계시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전자와는 달리 후자에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선지자적 영감과 사도적인 영감이 포함된다는 사실에서 상이점이 발견된다.

  특별계시가 종결된 이후, 우리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곧 객관적인 특별 계시요, 성경 외에 더 이상 다른 특별 계시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계시에 대해 헤르만 바빙크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수납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나타난) 객관적 계시로서는 충분치 않다. 거기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동반해야만 한다."고 하여 객관적 계시외에 성령의 조명, 또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주관적 계시(주관적 계시)라 칭했으나, 그가 말한 의도는 객관적 특별계시의 내용의 불충족성(불충족성)을 말함이 아니다 .


  바빙크는 그의 책 신학의 방법과 원리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 지어, 천국을 땅 위에 세우며, 세상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속하고, 이 모든 것 가운데,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더욱이,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객관적인 특별계시가 주어져도, 타락한 인간이 이러한 계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로써 아들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계속 있어야만 한다. 학문을 연구할 객관적인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정죄하고, 판단하는 주관이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종교에 주관적 종교가 서로 응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객관적인 계시는 그것을 받는 주체 안에 "내면적 계시"를 요청한다.


  오늘날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내면적 계시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바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것이 객관적 계시와 연관을 가질 때에만, 바로 정립된다. 이로부터 벗어나가든지, 혹은 그것 위로 넘어서서 스스로 높은 체 하게 되면, 주관적인 계시는 그 표준을 상실하게 되고, 이로써 각양의 미혹과 미신에 이르는 문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주관적 계시에 관한 해석은 오직 객관적인 계시에 의하여 바로 잡아져야 한다.

  객관적 계시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다 계시되었으므로, 어떠한 부분만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아니했다. 만약 객관적 계시가 다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신인(신인)의 합일(합일)에 관한 의식(의식)을 밝히고, 이것을 강화하는데 그친다든지, 혹은 다만 경건한 감정을 되살아나게 한다든가, 혹은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의식을 높여, 천국건설에 함께 참여케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성령을 통한 내면적 조명의 필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특별한 은혜"(gratia specialis)로 말미암아 세상과는 구별된다. 이렇게 특별히 구별된 성령의 사역,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주관적인 성령의 사역을 "넓은 의미에서" 계시(openbaring)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미 주어진 객관적 계시에 첨부한다는 의미에서 "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이 주관적 계시는 다만 신자로 하여금 객관적 계시를 알게 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도록 한다.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대하여, 인간은 성령의 주관적 계시의 역사에 의하여 종교적인 응답을 하며 하나님을 섬긴다. 이러한 바빙크의 견해는 비록 그의 용어가 혼란을 일으킬 요소도 없지 않으나 개혁파 전통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 하든 주관적 계시라 부르든 이 성령의 주관적 사역은 객관적 계시에 동반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개관적 계시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다는 의미의 계시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방편으로 죄인들을 그들의 존재(실유)와 의식에서 계속적으로 갱신(갱신시키신다. 객관적 계시인 성경은 교회의 확장과 지도,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우는 일을 위한 성령의 중요한 도구이다 . 이렇게 칼빈주의 성경관은 객관적 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 성령의 영감(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


  객관적 계시로서의 성경은 성령의 영감(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 영감(영감)의 교리가 의미하는 바는 성경이 중대한 사실(사실)의 기록(기록)일 뿐 아니라, 그 기록은 진리(진리)이며 그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사고와 표현의 습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류로부터 보호되었으므로 그들의 소산인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무오(무오)한 표준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영감)에 대한 확신은 메이첸의 말과 같이 성경의 진실성과 진리성, 무오성, 권위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칼빈주의 교회의 전통은 신앙고백서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신앙고백의 처음엔 항상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영감과 그에 따른 권위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칼빈주의 성경관에서 핵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영감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 성경의 유기적 영감(영감)


  루이스 뻘콥은 "유기적(유기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은 마치 기자가 펜을 사용하는 것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셨거나 그가 그들에게 쓰기를 원하신 말씀들을 그들의 귀에 속삭이지 않으셨으며 다만 그들 자신의 내면적 존재(실유)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작용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쓰이고 있다" 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또한 그들이 단어들을 선택하고 자신의 사상들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지도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견해에 대해 평하기를 "이 견해는 분명히 성경의 표현과 잘 조화가 된다. 그것은 성경의 기자들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미리 그들이 기록한 일들을 조사하였다(눅1:1-4).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의 저자들은 반복하여 그들의 근거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환경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또한 신약의 서신들도 우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시편 기자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경험들과 죄, 용서에 대해 (시32:과 51:), 둘러싸인 위험들과 은혜스러운 구출(시48:과 116:)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시인들과 선지자들의 숭고한 시와 시적인 언어와 병행하여 우리는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산문을, 그리고 이사야의 순수한 히브리어와 병행하여 다니엘의 아람어적인 색채를 가진 히브리어를, 바울의 통용적(방언적)인 체제와 병행하여 요한의 단순한 언어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 그 자체는 그것이 기계적으로 영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성령은 기자들을 그들의 인격(personality)를 억압함이 없이 그 자신이 그들을 각기 임무를 위해 조성하신대로 사용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셨고 지도하셨으며 그리하여 성경책들을 유기적으로 영감하셨다" 하였다. 성경의 영감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영감을 주다", 혹은 "영감"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표현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신적 기원을 나타내 주는 다른 표현 양식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입", "성령의 학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표현 양식이 그것이다. 칼빈은 인간 기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너무 압도당해서 그들은 성령의 확실하고 성실한 서기로서 봉사하여 "성령이 부르는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칼빈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한 원리로써 받아들여야만 한다.

  곧 율법과 예언서들은 인간의 쾌락을 위하여 전수된 것도 아니며, 그 근원이 인간의 정신에서 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하여 구술되어진 것이다." 칼빈은 구술이란 용어를 그의 주석 전반에 걸쳐, 특히 예레미야와 바룩에 대한 토론에서 사용한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이 구술에 대해 언급할 때 ,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주시는 교리나 가르침이란 배경하에서 이 "구술"이란 개념을 이해하였다 . 그러므로 칼빈이 구술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칼빈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단어와 사고에 따라,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독특한 상황 안에서 신의 가르침, 혹은 복음의 메시지를 설명하였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계시로써 인간들에게 주어진다.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기자들은 그들이 독자의 능력과 특별한 상황에 맞추어 전할 낱말을 선택하고 그들 자신의 생각을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었다. 신의 메시지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칼빈이 영감을 "구술"로써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워필드는 성경론의 해설로 유명하다. 그는 한 평생 성경의 완전영감과 무오를 변증했으며 당대에서 가장 잘 변호할 수 있었던 변증 가였다.

  그는 딤후 3:15-16을 해석하면서 15절에 성경이란 말이 한번 나오지만 이는 성경의 신적기원을 가진 것이라 강조했다. 또 16절의 하나님의 감동을 풀이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의미하며, 모든 성경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라 했다.

  또 벧후1:19-21말씀 역시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리킨다고 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이란 본래 운반이라 뜻이란 뜻인데, 이는 마치 물건이 운반자로 말미암아 운반되어 목적지로 옮겨지듯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전연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끌려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적 영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은...철두철미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책으로 인식되는데, 매 곳에서 하나님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고, 사람이라는 그들의 본성으로 왜곡시키지 않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을 통해 주어진, 매 곳에서 인간 저자의 시상을 나타내고 있는 그런 책으로 인식되었다"인간 저자들은 구애받지 않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임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위해 필요한 한도까지 계시하셨다. 그 결과로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를 정확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유기적 영감의 증거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


  첫째, 성령이 선지자와 사도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사로잡고, 인도하사 그들 자신이 생각하며, 말하며, 또한 기록케 하신다. 성령의 강한 역사로 감동되었지만, 말하는 이는 역시 그들 자신이다(벧후 1:20). 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에, "제일저자"의 이름으로 한 것이 많지만(눅1:70, 행1:16 등), 제2 저자, 예컨대, 모세, 다윗, 이사야의 이름으로 인용된 곳도 적지 않다(마13:14,22:43,요 1:23,46, 5:46,12:38 등).


  둘째, 소위 성령에 의한 <기록에의 충동(충동)>이 유기적 영감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직무가 반드시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고,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글을 썼다는 자체가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감동하심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셋째,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기록의 단계로 넘어갈 때,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을 보며, 계시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여유가 있었다. 시편에는 경건한 찬송이 담겨졌지만 탄식과 기쁨과 간구와 감사가 뒤섞여 있다. 저자들의 소망과 두려움, 믿음과 신뢰, 비참과 탄식이 그려져 있다.


  네째, 성경기자들의 문체가 다 각각 특색이 있고, 서로 다르다는 점이 유기적 영감을 지지한다. 요컨대, 성경기자들의 교양과 지식, 정서와 경험 등, 그들의 인격 전체가 유기적으로 사용되면서도, 성령이 제일저자가 되어, 그들을 감동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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