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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조회 16304 추천 0 비추천 0 2018-09-17 07:53 작성자 : 이목사


     1. 하나님께서 인간을 맨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
셨다고 창세기 1장 26절 이하는 기록하고 있다.  몇몇 구약 신학자들은 이 구절
이 현대인들의 생각처럼 인간이 영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 그 육신의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과 유사함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표현 방법
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다른 구절들도(민 12:8) 하나님이 영이 아니라 가시
적인 존재임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전 1세기 이래, 전 기독교 사
상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인간이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어떤 영적
인것, 그리고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지칭해 왔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개념은 이미 구속의 틀과 연결되어져 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불리워지고(고후 4:4, 골 1:15), 진정한 신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그 형상 안에서 계속 새로워져 가야 한다.
     이 개념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인간의 원죄의 본질과 범위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아담의 인간
적 본성 위에 선물로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혜와, 바로 그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
을 구분한다.  전자 속에는 인간에게 의를 제공해 주는 성화의 은혜와, 불멸성
과, 완전성 등의 초자연적을 부가된 것들이 포함된다.  이 초자연적인 은사는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초자연적인 존재
의 질서로 끌어 올리는 것도 아니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이
타락하였을 때, 그는 이 초자연적 은사(하나님의 모양 similitudo dei)를 잃어
버린 것이고, 그의 인간적 본성(하나님의 형상)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이 상처를 입어서 정욕의 노예가 되기 쉽지만, 그 상처는 그
렇게 깊은 것은 아니며, 인간의 본질적인 이성과 자유의지(이것이 바로 하나님
의 형상인데)는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구분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이와 같
은 해석이 창세기 1장 26절 이하를 잘못 주해한 데 기인한다고 생각하였다<참조
: 시밀리투도 데이>.  또한 이 해석은 아담의 타락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어
떤 것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죄도 역시 인간 본성의 왜곡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명목을 제외한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면을 다 상실하였고, 특히 의지의 자유를 상실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이 소유하고 있던 일종의 완전성, 즉 욕정이 이성에 의하여 다스려
지고, 모든 것이 조화롭게 질서지워져 있는 완전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였다.
타락과 더불어 이 완전성이 소멸되거나 지워 없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너무
나도 타락하여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참혹한 기형(horrible deformity)"일 뿐
이다<참조: 전적 타락>.  일반적으로 루터교의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에
강조점을 두고, 칼빈주의는 상실이 아닌 타락을 강조하였다.  로마 가톨릭 신학
자들은 개신교의 견해가 인간의 자연적 도덕성을 파괴하는 반 인간주의적인 견
해라고 비판하고, 반면 개신교 신학자들은 카톨릭의 견해가 죄의 깊이를 무시하
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개신교 스콜라 학자들은 개혁자들의 견해를 체계화 하
였는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단지 용어만 바꾸어 사용
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개혁파 신학자들은, 죄는 인간 본성의 일부가 아니므
로(전문 용어를 사용한다면, 우연적인 것이므로), 인간의 원의도 인간 본질에
귀속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루터파 교리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에
게는 자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원의가 인간의 구성요소일 수 없다고 논증하였
다.
     자유주의 개샌교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원죄나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 같
은 개념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지만, 인간의 신적 속성이나 불멸성
등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형상 교리는 듣기 좋은 개념들이었다.  그들의 견해는
다시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반박을 당하였다.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혁자들의 견해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라인
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개혁자들이 초자연적 은사의 개념을 반박한 것
은 옳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니버는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속
성(하나님의 형상)의 남아있는 부분을 공정하게 평가하려고 시도하였다.
     하나님의 형상 교리는 때때로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자연적인 신
지식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930년대에
일어났던 바르트와 브루너의 논쟁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파괴되었지만 그 형식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
촉점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이러한 구분을 반대하며, 인간의 형상
은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하
였다.
     2.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주제가 되어 왔던 그 신학적 사변을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  또
한 우리는 하나니의 형상이란 표현이 신약성경의 사고 속에 도입될 때 생긴
큰 변화와 분리시켜서 그 구약적 의미를 살펴야 한다.  단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개념 모두를 올바로
파악할 수가 있다.
     창세기에서 제사문서 기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래 구체적인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기자의 의도는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 있는 인간의 인격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
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
로 인해 상실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은 어떤 것으로 나
타난다(두 곳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그것은 원형을 완벽하게 반영한 존재인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희망이며, 또한 (어느 정도는) 현재
의 사실인 것이다.
     (1) 구약성경에서:  1) 증빙자료:  구약에서 나타난 주요한 증빙자료들은
그 범위가 국한되어 있다.  참고해야 할 구절들을 들면, 창 1:26-27, 5:1-3, 9:
1-7(모두가 제사문서에 속해 있으며, 서로 관련을 가지고 쓰여졌음이 분명하다)
등이 있는데, 이 외에도 그 주제를 시적을 다룬 시 8편을 첨가해야 한다.  그러
나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엄밀하게 관련이 있지는 않으나, 외경의 두 구절, 즉 외집 17:3과 외지 2:23-
24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외지 7:25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2) 언어학적 고찰:  이것에 대해 몇가지 예비적인 관찰을 할 필요가 있다.
창 1:26에서는 두 단어, 즉 tsalem(형상)과 demut(모양)가 사용되었다.  1:26에
서 제안한 것이 이루어진 1:27에서는 이 두 단어 중 전자만이 사용되고 있다. 
창 5:1에서는 두번째 단어만이 나타나며(때로 편집자의 주로 여겨지기도 함),
9:6에서는 첫번째 단어가 나타난다.  5:3에서 우리는 아담과 그의 아들 셋과
의 유사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이 쓰여짐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위의 두 단어가 모두 나타나지만, 그 순서가 바뀌어져 있다.  해석하기 더욱 어
렵게 만드는 것은, 명사들과 함께 쓰인 불변화사들의 사용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5:1에서는 demut에, 1:26-27의 tsalem에서 함께 쓰인 불변화사가 나타
나고 있다.  반면에 5:3에서는 그 불변화사들이 변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약
45개의 사본들에서는 그 독법이 1:26의 것과 일치하고 있다.
     1:26에서 tsalem과 함께 쓰인 불변화사는 beth essentiae, 즉 동일성을 의
미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동일성을 표현
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닮음을 의미하는 demut에 붙어 다니는 불변화사가 때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사실상 형상과 모양대로라고
해석하게 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형상으로(형상을 따라서) 또는 그 모양을
따라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참조. rsv).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며, 그것은 tsalem과 demut가 어떻게 이해되느냐 하는 그 방식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
     tsalem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17번 나타난다.  그 중 다섯 번은 이미
언급한 구절들에 속한 것이며, 그외의 열 곳에서 나타난 그 말의 의미는 분명히
구체적이다(상.모형.그림).  그리고 나머지 두 곳(시 39:6, 73:20)에서는 그림
자, 꿈으로 번역함이 적당할 것 같다.  이 두 곳에서의 tsalem이 독특한 하
나의 아랍어 어근에서 파생된 다른 단어로 여겨져야 하는지 아닌지는 논란의 대
상이 되는 문제이며, 다른 열 곳에서 나타나는 그 단어는 깎다를 의미하는 한
아랍어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두 개의 분리된 어근이 있었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창세기의 다섯 군데를 매우 구체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단 하나의 어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양극성의
원리 위에서 tsalem이란 단어는 한편은 구체적이며, 다른 한편은 추상적일 수
있다고 말하게 되며, 창세기에 나타나는 경우들은 그 중간 어느 지점으로 여길
수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제안은, 그 문맥에서의 tsalem은 제2의 아랍어 어근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림자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견해는 tsalem이 첫번째 경우에서는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창 1:26의 두번째 단어인 demut는 의미상 훨씬 추상적으로 나타나며, 어떤
경우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계획이란 뜻
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1:26에서 두 단어가 함께 쓰여진 것은 그 기자가 하나님의 어려운 개념을
표현하고자 애쎴다거나 아니면  tsalem이 너무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위험
을 미연에 막기 위한 것임을 암시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요약적으로 고찰해
본 언어학적 증거에 의하면 두개의 명사, 또는 여기에 쓰여진 대로 두개의 불변
화사 사이에는 그 의미에 있어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해석: 이제는 제사문서 기자가 진술한 의미를 결정짓는 일을 해야 한다.
한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은 tsalem과 demut 이 두 단어를 엄밀한 의미
에서 가장 구체적인 의미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유사
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형상이라든지, 아니면 인간은 실제로 구
체적인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따라 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길가메쉬 서사시 중 논란이 되고 있는 한 구절에 대한 한 해석(al-
torientalische texte zum at i 80 ff anet 73-90)은 위의 두번째 의미를 지
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zikru란 단어는 아마도 모양을 의미한다
기보다는 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바벨론 또는 수메르의 서사시(
여러가지 예를 들 수 있다)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
는 언급은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제사문서 기자가 창 1장을 제외한 모든 곳
에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은 여기서도 역시 그가 신화를 고
의적으로 배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여기에
는 인간이 그의 혈관 속에 있는 하나님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바벨론 신앙의 어
떤 흔적도 없다.  창 1:27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별에 관한 설명이 하나님
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 관한 설명과 분명하게 분리되어 나타남은 수메
르 전례에서 나타나듯이 남자와 여자가 남신과 여신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
다고 하는 견해를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또 하나의 극단적 입장은 tsalem의 구체적인 의미로부터 완전
히 분리되어 단순히 영적인 해석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 단어를 인격, 자의
식, 자기 결정, 불멸(참조. 외지 2:23-24), 이성, 심판을 모면하는 능
력, 자유의지, 도덕적 능력 등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제사문서 기자가 믿고 있듯이 모든 인간에게서(이집트에
서는 특별히 왕의 특징을 가리킴) 나타나는 특징적인 어떤 것이다.  제사문서
기자는 타락 설화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는 인간은 하
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며 그러므로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일 것이
라는 주장을 홍수 이후에 인간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이유로서 설명
하고 있다.  이것은 유스티니아누스와 이레네우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교리
적인 해석을 결정짓는다.  즉 tsalem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성
이고, 반면에 demut는 타락 이후에 상실해 버린 본래적 의(justitiaiginalis
)라는 해석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 함은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을 닮은 것과 비
슷하다.  이것은 신체의 유사성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소년의 존재를 그 아버지의 살아있는 형상이라고 말
하는 것이다.
     창 1:26에 소개되고 있는 인간 창조의 방식과 또한 인간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보다 더 신성한 것이며, 그러한 차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된 것임을 암
시하는 9:1-7의 내용은 그 저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인
간 특유의 존엄성을 어떻게든 표현해 보고자 한 것임을 시사해 준다.  1:26-27
에서 저자가 여자는 남자의 너인 것 같이 남자는 하나님의 너임을 암시하려
했다는 생각은 전혀 타당성이 없지는 않으나 매우 의심스럽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라는 생각은 배제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동상은 실재하지 않는 통치자를 대표할 수 있다(참조.
단 3장)는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 제사문서 기자의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곧바로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위엄과 권위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의 직립 형태를 암시적으로 언
급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과 동물은 서로 다르며, 그 구분이 모호해져
서는 안된다(레 20:15-16).  신 4:15-24을 근거로 하여 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체적인 유사성이 의도적으로 암시되었다는 가능성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호렙산에서 어떠한 형태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형태를 입고 계신다는 것고 또한 그 형태가 구약성경에서 묘사된 어떤 현현들에
대한 명백한 암시라는 점이 부인되지는 않는다(예. 사 6장 겔 1장).  구약성경
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신앙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신앙 사이에 묘한
관계가 있다.  창세기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다-이것은 바로 그가 강력하게 부인했던 것임-는 것이 아니라, 하나
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 저자는 유사성을 말함
으로써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암시하고 있다.  외적인 유사성을
고집한다고 해서 영적인 유사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또한 인식하여
야 한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이중성으로서 취급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하나님에 관하여 신인동형론적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원시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제사문서 기자가 신인동형론적인 언어를 가능한
한 피하고 있음도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사문서 기자가 구체적인 용어인
tsalem을 사용할 때,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리라는 가능성
을 나타낸다.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외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라고 볼 수 있으나-제사장이었던 에스겔 역시 그런 생각을 지
니고 있었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제사문서 기자는 어느 정도 추
상적인 개념에까지 도달했던 것 같다.  제사문서 기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
상은 인격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견해는 아닌 것 같다.  여
기서의 인격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라는 의미로 이해되
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는 부여받은 어떤 권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권위를 행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책임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보다 저차원적인 피조물을 지배하는 의무나 또
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용어로 한정되어서는 안되지만(참조. 외집
17:3), 그 두 개념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시 8편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는 하나님은 인간으로까지 낮아지셔서 인간을 돌보시며, 인간들에게 신이
나 왕의 명예보다 약간 낮은 지위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행사할 수 있
도록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웠다고 하는 말은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존엄, 이 두가지를 모두 암시하는 것이다.  에덴에 거하는
두로 왕에 관한 신화적인 설명(겔 28:12,17)은 아름다움과 또한 지혜를 모두 부
여받았음을 암시한다.  시 8편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문화적인 임무를 수행하
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존엄성과 권위와 외적인 고귀함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참조. 창 1:26,28).
     (2) 신약성경에서:  1)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구약적 개념: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구약의 개념이 신약의 두 구절, 즉 고전 11:7과 약 3:9에서 아무런 변
화없이 나타나고 있다.  고전 11:7에서는 eikon(tsalem의 칠십인 역)이 doksa(
참조. 시 8편)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반면에 야고보서에서는 homoiosis(demut
에 대한 칠십인 역)가 사용되고 있음에 주의를 요한다.  마찬가지로 롬 1:23에
서는 모양(demut)이란 뜻으로 homoioma가 쓰였고, 반면에 eikon은 모양이란
점에서 형상 이상의 어떤 것, 즉 원형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나타내는
모양으로 사용된 것 같다.  eikon의 의미가 이처럼 변화하는 것은 또한 히
10:1에서도 볼 수 있으며, 거기서는 eikon이 skia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2) 신약성경에서의 개념 변형:  신약성경에서는 eikon이란 말(tsalem에 대
한 칠십인 역)의 의미가 모양으로부터 원형의 완벽한 반영이란 뜻으로 결정
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하는 생각을 거의 완전히 배제해 버리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대
로 지음을 받은 존재, 즉 하나님의 원형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대치시킨 것보다 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은 없다.  외지 7:25-26에서 지혜는 "전능하신 분께로
부터 나오는 영광의 티없는 빛"이며,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요, "하나님의
활동력을 비쳐 주는 티없는 거울"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같은 묘사가 히 1:3에서는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
고 있다.  "이는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또한 이 히브리서
의 서두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주장은 서신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
가 그림자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확신을 지배하고 있다.
     요한 문헌에서 중심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은(비록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
현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독생
자로서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고(요 1:14),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요 12:45, 14:9)이라는 것이다.  요일 3:2에서는, 인간들은 이미 하나
님의 자녀이지만, 더 영광된 운명이 예비되어 있어, 즉 하나님과 같게 되거나
또는 그리스도와 같게 되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
적이다.  바울의 사상을 살펴 보면, 그런 개념 변화가 아주 완벽하게 이루어지
고 있다.
     3) 바울의 견해:  바울의 저작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
스도에 관한 새로운 생각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인간의 운명에 관한 문제와 연
관이 되고 있다.  골 1장에서는 사랑의 아들(13절)이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설명되고 있는 반면에, 고후 4:4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쓰여 있다.  두 곳 모두에서 eikon이란 단어가 쓰였다.
하지만 바울은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실제적인 결과들에 관심을 쏟았다.  그에
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철학이 아니라 그의 복음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천상적 인간(창 1:26)과 진흙으로 빚어진 세상적 인간(창 2:7)을
구분한 필로와 같이 창 1-2장에 대한 그러한 주석을 받아들이고 있는 바울은 하
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창 1:26)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필
로가 그러한 인간을 로고스와 일치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견해는
고전 15:45-46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ho protos anthropos
adam(첫 사람 아담은 창조시에 흙으로 만들어져 생령이 되었다. 따라서 choikos
)과 ho eschatos (deuteros) anthropos(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
참조. 고후 3:18, 영이신 주)를 대조시키고 있다.  만일 이것이 이란의 인간
신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자유로이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관해 말하고 있으나, 인간인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
급도 하고 있지 않다-실로, 그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보면 그렇게 하기를
고의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참조. 골 1:15,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 빌 2:6,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늘에서 온
사람(고저너 15:47)은 선재한 인간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창 1:
26에 근거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이 우주론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원론적 관심에서 나온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의 머리에는 인간이 처음에(창 1:26) 약속으로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빌 2:6-8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하나님이었으나, 종의 형체와
사람의 모양으로-두 경우 morphe는 존재 양태를 의미함-변화하셨음에 대해 말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관계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골 3:10에서 옛 사람의 새 사
람으로의 변화-"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
니라"-는 인종적, 종교적, 사회적 차별이 더 이상 아무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
며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모든 것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낼
것이다(참조. 엡 4:22-24).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하신 말씀을 따라야만 한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그 둘 사이에는 아
무런 차이도 없기 때문에)으로 되어야(summorphous)한다(롬 8:29).  이것은 종
말론적 희망이며, 또한 약간 현재적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수건을 벗
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기 때문이다(고후 3:18, 참
조. 빌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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