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설교로 목회하라! 설교와 목회 - 김기홍 목사님 편

추천 : 13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6-10-28 11:28

한국교회가 대내외적 문제들로 인하여 심각한 침체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선 외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들로 인한 저항이고, 내적으로는 목회자의 영성이나 목회자의 자질적 문제로 큰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대략 1년에 3천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이런 한국교회 심각한 상황을 두고 <목사월드>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17년간 역사학과 설교학을 가르치셨고 분당 아름다운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셨으며 현재는 은퇴 후 <Faith목회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침체되고 사역에 지쳐있는 목회자들에게 믿음의 목회를 전수하고 계시는 김기홍 목사님과 대담을 나눠보았습니다.

 

 

  

1. 목사님, 한국교회가 참 힘듭니다. 성장의 동력을 상실했고 특별히 개척교회들이 참담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장의 동력을 상실한 게 아닙니다. 성장의 동력을 몰라서 아예 이용하지 않고 각종 다른 방법으로 목회를 하려하니 그런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복음을 의지하고 나가면 얼마든지 강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목회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바꾸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그 의미를 이해 못합니다. 영적 말씀을 세상 지식적으로만 듣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면 언제든지 생명과 능력을 얻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뻔한 소리 같지만 정말 진리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장 동력인가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든지 주시는 힘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어린아이에게 1억 원짜리 수표와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놓고 어느 것을 갖겠냐고 하면 당연히 동전을 집습니다. 수표는 생소하기도 하지만 사용하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0원은 익숙하고 당장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표를 강조해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100원짜리로 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영적권세와 인간의 방법과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 가르치는 방법들은 거의 모두가 세상적인 기술일 뿐입니다. 장터도 하고 도서관도 하고 카페도 하고  길에서 밥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 방법에서 자선 사업하거나 회사 운영하는 수준입니다. 재정확보나 인원확보도 만만치 않습니다. 무조건 덩치가 커야 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계속 경쟁하고 싸웁니다. 교회 내에서도 중직들과 갈등이 심합니다. 스트레스 말도 못해요. 그러면서도 한계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몰라요.

 

그러면 무한한 액수의 수표 같은 목회 방법은 무엇인가요? 매사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목회자가 없겠지만 실제로 그 의미를 알고 행하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우선 예수를 의식합니다. 그러면 그의 앞에서 그를 모시고 사는 삶이 됩니다. 그리고는 매사 예수를 의지합니다. 그러면 예수와 하나 되어 일하니까 영적 존재로 바뀌면서 그 삶이 영적으로 됩니다. 그에게 묻고 대화하세요. 물론 그런다고 무슨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안 해도 그 삶은 영적입니다. 영적 삶은 세상적으로도 넘치도록 풍성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고 사명을 이루었어요.

 

에녹이 하나님과 300백년을 동행하면서 무슨 놀라운 일을 했나요? 그 앞의 가인의 후손들은 큰일들을 합니다. 성을 쌓고 악기 만들고 농사짓고 전쟁 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아요.

 

에녹은 무슨 일을 했나요?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당시 팔백 살 구백 살 살 때 365년 살았다면 장수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 일도 자녀 낳은 것밖에 없어요. 그래도 그는 영원히 복된 존재였어요

 

이렇게 말해도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우리 모두 에녹과 같아요. 당시에는 에녹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지요. 오늘날 예수 영접한 분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앞에서 설명한대로 함께 계시는 살아있는 구원이신 예수를 항상 의식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는 모든 일이 영적입니다. 목회도 영적으로 됩니다. 무슨 뜬 구름 잡는 말이냐고 묻겠지만 삶이 너무도 감격스럽고 너무도 풍성합니다.

  

2. ACTS(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셨는데 목사에게 설교란 무엇입니까? 또한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목회자의 자격과 자질의 기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설교는 복음을 삶에 적용시켜주는 과정입니다. 그러려면 설교자부터 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영적세상의 능력을 알아 그 힘으로 살아보아야 합니다.

 

자신부터 열등감과 좌절로 넘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내용을 말해도 전혀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인들에 마음에 어두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다면 설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힘들게 살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더 모든 것이 힘들어집니다. 이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는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한 분 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고 있는가?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이 빛나고 있는가? 그래서 이 놀라운 삶을 교우들과 나누려고 하는가?

 

이것이 분명하다면 교회는 당연히 영적 권세로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교인수도 점점 늘어갈 수밖에 없어요. 설교자 자신이 예수로 인해서 정말로 수지맞은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 불이 꺼진 상태로는 설교가 오히려 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슬픈 설교나 혼내는 설교 또는 강의밖에 나올 게 없어요. 예수를 주고 적용시켜야 하는데 예수는 빠져있고 모든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많은 설교들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바로 본론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향해 문제를 향해 어떻게 해결할지로 들어가세요. 그러면 관심이 집중됩니다. 복음은 혼내지 않습니다. 길을 보여주고 힘을 줍니다. 바로 일어서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설명만 하지 말고 적용을 시켜주세요. 예수를 계속 믿고 의지하여 살게 하세요. 예수 믿는 게 가장 선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3. 설교를 잘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설교 잘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 잘 이해해서 적용시켜주어야 합니다. 많은 설교들이 필요 없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바로 예수를 전해 복음을 말하고 삶에 적용시켜주세요. 그러면 안 들을 수 없어요. 영혼에서부터 듣습니다. 그리고 변화합니다. 설교 잘하는 분명한 방법입니다. 복음을 어떻게 잘 설명할까 연구하다보면 전하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토요일에 가서야 설교를 준비합니다. 늦었지요. 설교가 안 나와서 몸부림을 치다보면 밤늦게까지 심지어는 주일 새벽까지 준비를 합니다. 아침에 교회가면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당일치기로 한 설교는 최선의 것이 아닙니다. 몸도 무리를 해서 망가지기 쉽습니다. 토요일은 주일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쉬면서 여유롭게 해야 합니다.

 

항상 주일 오후 그날 일을 다 마치면 하나님께 다음 주일 할 설교를 물어보세요. 그러면 가슴에서 무언가 올라옵니다. 그것을 써놓고 쉬세요. 처음에는 어려워도 조금만 연습하면 마음에서 솟아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월요일부터 아침저녁으로 잠깐 동안만 그 내용을 보면서 조금씩 첨가하세요. 금요일쯤이면 설교가 마쳐집니다. 토요일은 쉬면서 설교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까 연구하세요. 토요일에 쉬어야 주일에 힘을 발하게 됩니다. 간단해도 실제로 하려면 잘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연습하면 습관이 되어 저절로 됩니다.

  

4. 한국교회의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성장의 동력은 만고불변합니다. 시간과 장소와 상황을 지배합니다. 목회자가 복음을 알고 그 힘으로 살면 교회도 일어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 그래서 내가 어떤 놀라운 사람으로 변했는지,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지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복음의 내용으로 살아간다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3차원의 현 세상은 모든 게 부족합니다. 그래서 항상 싸웁니다. 심지어 교회끼리도 경쟁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상은 모든 게 풍성합니다. 보리떡 5개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습니다. 복음의 원리로 도전하면 시기한 도움이 오며 풍성한 목회가 열립니다. 눈앞에 펼쳐지고 경험되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걸립니다만 일단 마음에 불을 켜면 즉시 영적세계도 열립니다.

 

힘든 분은 목회자학교(Faith목회아카데미)로 오세요. 두어 달 연습하면 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우주보다 더 강력한 힘 사용하는 법을 배우면 됩니다. 한두 번 강의를 들어도 힘이 납니다만 며칠 지나면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영적권세를 얻어도 유지되지가 않습니다. 생각하는 습관이 세상적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습관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습관만 되면 저절로 됩니다. 복음으로 살고 목회 잘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 제목처럼 성공도 실패도 잘 사는 것도 못 사는 것도 다 습관입니다. 습관을 바꾸면 저절로 됩니다. 잘 되는 목회의 습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5. 분당 아름다운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고 현재는 원로목사로 계십니다. 개척교회 성장의 모델을 보여 주셨는데 어떤 목회를 하셨습니까?

 

처음에는 기존 목회방법을 따르다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차츰 목회의 원리를 이해하면서 많이 쉬워졌습니다. 자신에게 먼저 복음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와 교회 운영으로 교인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말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다 해냈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단히 부족하게 실행했지만 하나님은 너무도 풍성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염치가 없고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목회한 내용은 작년도 월간목회에 실었고 금년에는 목회원리를 기술했습니다. 이제 곧 책으로 나옵니다. 제목은 아직 안 정했는데, <목회, 이렇게 하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척 시작할 때는 한 1000명 정도 모이면 사임하고 이 원리를 강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500명이 넘어가면서부터 교우들 이름 외우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을 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데 내가 그들의 담임목사? 실제로 수천 명 수만 명 모이는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저의 1/10 정도도 이름을 못 외우고 있었습니다. 교인이 많으니 자신이 늘 상대하는 이들의 이름만 아는 겁니다. 담임목사로서 이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은퇴를 준비했습니다. 전임목회 14년차 당시 예산은 약 15억 원, 어린이들 수는 200여명이었습니다.

 

교회는 건물 크기나 교인 수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그리스도의 권능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처럼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인수도 늘고 재정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질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권력이 많아질수록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의지해 절제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분당 아름다운교회 전경)

 

6. 현재 Faith목회아카데미 원장으로 목회자 재교육에 힘쓰고 계십니다. <Faith목회아카데미>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Faith목회아카데미는 이 원리를 훈련시켜드립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목회하면 쉬워집니다. 바울이 하셨던 바로 그 목회입니다.

 

강의를 들으면 금세 공감을 합니다만 습관이 안 되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무엇이나 저절로 되려면 두어 달 훈련을 해야 합니다. 습관만 되면 아무리 무거운 것도 들고 힘든 일도 해냅니다. 잘되는 목회 두어 달 훈련하면 살아납니다. 마음에 불이 켜지고 그 빛이 자신과 가정과 주위를 비춥니다. 갈 길도 방법도 보여줍니다.

 

훈련도 어렵지 않아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복을 누리게 하니 매 시간이 감동이요 기쁨입니다이미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수렁에서 빠져나와 하늘을 나는지 모릅니다. 더 자세한 것을 알기 원하시면 www.fma2.com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저작권자 목사월드

  

<교회와 신앙김기홍 목회칼럼 중에서

 

* 하나님의 의의 적용

하나님의 의는 내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얻는 의는 아무리 해도 죄인의 의요, 인간의 의요, 육신의 의이다.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영적이고 영원하고 거룩한 복을 받아낼 수가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가지고 사람이 되어 오신다. 그분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이다. 그의 영을 모심으로 하나님의 의도 동시에 들어온다. 이 사실을 믿음이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진리이다.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에 이 놀라운 완전한 의의 개념이 없다. 불교식으로 아무리 다시 태어나서 선을 행해도 여전히 영이 아니라 육신이다. 인간이요 죄인이다. 그러나 그 의가 내 안에 들어오셨음을 믿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의로 의로워진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고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신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말이다. 내가 내 힘으로 행한 것을 내려놓고 순전히 하나님의 의만 잡고 그것만 내세워야 한다. 그러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

 

교육전도사 시절 고등부 토요성경공부 시간에 강의하면서 그 깨달음이 넘쳐왔다. 강의를 준비하면서도 몰랐던 영적 지식이었다. “, 그렇다. 하나님이 내게 거저 주시는 의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의이다. 하나님의 의로 의로워진다. 완전한 의를 나는 받았구나!” 감격으로 목이 메었다. 강의를 진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도 메시지를 받았다. 그들도 감격했다. 모두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조용했지만 모두가 동시에 완벽한 회심에 들어갔다. 방안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자신과 학생들 모두는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전에는 내 힘으로 의를 행해서 대가를 받으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먼저 행동을 해서 조금씩 의로워지려고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은 너무 높았어요. 이제는 예수님 덕분에 먼저 의로워지고 의인으로서 의를 행하게 됩니다. 부족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의는 나를 완전하게 의롭게 만들어줍니다. 무엇을 하든 언제나 먼저 믿음으로 의인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이런 수준의 신앙을 말할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내 자신도 완전히 달라졌다. 죄인으로 의로워지려는 삶이 아니었다. 의인으로 의를 행하는 삶이었다. 설교도 달라졌다. 전에는 복 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고 했다. 이제는 받은 복을 믿고 노력하라고 한다. 노력하고 열심히 하나님 섬기고 열심히 살라는 말은 같은데 출발점이 달랐다. 먼저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 그 믿음으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다른 설교자들과 반대였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도 일어났다. 혹시, 내가, 이단이 되었나? 왜 나는 다르게 설교하지?

   

그래서 찾아본 게 어거스틴이요 루터요 칼빈이었다.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들도 나와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게 되었다. 변화도 치유도 많이 일어났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가?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조건을 다 이행하시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하나님 안에만 있는 의를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받으라고 한다. 그래서 완전한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받으라고 한다. 완전한 의로 천국을 받고 누리라고 한다. 설교는 이 복음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복의 힘으로 산다면 자신부터 잘 된다. 먼저 양심이 깨끗해진다. 두려움이 없다. 완전한 의를 가졌으니까.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면 의를 행할 힘이 일어난다. 참으로 놀라운 계시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평생 믿는 분들이 너무 많다. , 하나님 듣는 분마다 성경의 복음 그대로 2천 년이나 전파된 이 비밀을 깨닫게 하소서. 참으로 하나님의 의는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일을 해 냈을 뿐 아니라 오늘도 모든 참되고 영적인 개혁을 준다.

 

  * 반드시 되는 목회

요즘 목회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냥 어려운 게 아니라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교회가 생기고 나서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 어디 있을까마는 특별히 어렵다고 한다. 이미 유럽에서는 교회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미국 교회도 많이 약해졌다. 한국교회도 그 뒤를 잇지 않는가 모두들 걱정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유럽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퍼졌고 이제 한국에도 힘을 발하고 있는 신자들의 관심사 때문이다. 관심사만 바꾸면 다시 교회는 힘을 얻고 일어나게 된다. 그 관심사는 하나님이 아니다. 세상이다. 하나님 믿는 것은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 일 돕는 전능하신 도우미이시다.

  

목회자들은 무엇이 최대의 관심사인가? 그것 때문에 울고 웃고 교만하고 열등감에 빠진다. 다른 게 아니라 교인수이다. 주의 종이면 서로 존경하는 게 아니다. 교인수가 얼마냐에 따라서 높고 낮음이 결정된다. 그러니 개척교회 시절부터 전혀 자부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 교인이 좀 늘면 펴지고 안 들면 더 쪼그라든다.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찬송에도 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기쁨되시니.” 정말로 그런가? 하지만 찬송은 하면서도 진짜 힘이요 기쁨이신 예수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좋은 음식을 나두고 배부르게 못할 불량식품에만 관심을 두는 아이 같다. 예수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기쁨이요 힘이시다. 이 말에 목회자라면 다 아멘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관심도 없다. 사용 방법도 모른다.

 

그러니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힘이 있겠는가. 목회자라지만 관심사는 완전 세속적이다. 교인 수 헌금 목사대우최대의 기쁨이 이것이라면 주를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세속적인 목적일 뿐이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8)

세속적 가치에 집중한다면 성직자는 될 수 있어도 예수의 제자는 될 수 없다.”

이번 신임 교황의 말이다. 교인 수 많고 교회 건물 커지고 이름 유명해지는 걸 목적으로 목회한다면 세속적 가치 아니면 무엇인가?

 

목회는 주의 종으로 주의 힘으로 주의 일을 돕는 것이다. 예수는 교인수가 많은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사람 많아지는 것을 요구하신다. 또한 교인수가 적어도 그 양들을 눈물로 기도하며 보살피기를 원하신다. 승천하시기 전 갈릴리 호수가에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세 번이나 부탁하셨나? “교회 건물 크게 해라. 교인 수 많이 늘려라. 한 만 명 모으면 내 수제자 삼겠다. 헌금도 많이 거두어라.” 그러셨나? “내 양을 먹이라.” 그렇다면 이 일에 관심을 써야 한다.

 

그렇게 예수의 일에만 집중하면 돈도 존경도 다 없는가? 다 포기해야 하는가? 가난하고 약해서 비참하게 될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님 믿어서 망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세속적으로도 다 잘 되었다. 하나님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 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는 복 중에 하나이다. 그것이 목적이 되면 우상숭배다.

 

물론 주의 뜻대로 산다고 즉시 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주 힘들 수도 있다. 굶을 수도 있고 창피 당할 수도 있다. 와이프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더 복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썩어질 육신이 고난을 당하다니 이건 정말 영광 중 영광이다. 열등감 갖는다면 완전 불신앙이다. 사도 바울을 보라. 수없이 맞고 굶고 감옥가고 모욕당했는데 주를 위해서 그런 것처럼 복이 어디 있겠는가. 일부러라도 고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자기 종을 버려두지 않는다. 자기 종의 훈련을 위해서 잠시 그냥 두기도 하신다. 그걸 감사함으로 통과하면 잘 된다. 그러나 잘 될수록 더욱 정신 차려야 한다. 부하고 유명해지면 누구나 다 넘어진다. 하나님 대신 돈과 명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무언가 부족한 게 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의지할 테니까. 아니, 주의 종 된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럽지 않은가.

 

이것이 목회자의 기본자세이다. 나 같은 죄인을 주의 종으로 부르시다니. 예수처럼 섬기며 종노릇하리라. 그러다가 잘 되면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리라. 지금이라도 이 마음을 품고 회개하고 고치면 목회는 된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함께 이 놀라운 신비의 세계를 향해 나가보자.  

 

* 교회 핵심 성격 정하기

2년이 지나자 교인수가 7,80명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전혀 늘어나지를 않았다. 정체가 되면 목사도 교인들도 생각하기 시작한다. 왜 더 안 늘어날까? 무엇이 문제일까?

 

안 될 이유야 물론 너무 많았다. 번듯한 교회 큰 교회에 비교하면 정말로 모든 게 부족했다. 우선 교회 간판부터 건물 중앙에 번듯하게 붙인 설윤형 부띡에 비해 오른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붙여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옆으로 내려가서 지하실이다. 항상 컴컴하고 습기 찼다. 주차장도 없다. 본당 외에는 부속시설도 없다. 교통도 불편했다. 버스도 전철도 근처에는 전혀 없었으니 가기도 어려웠다.

 

어디 그뿐인가? 교인들은 이상한 모습의 이상한 옷차림이지. 분위기는 냉랭하고 거만해 보였다. 쉽게 친할 모습이 아니다. 로데오 거리로 가게뿐이고 사람 사는 아파트는 멀리멀리 떨어졌다. 대충 보아도 전혀 교회할 장소가 아니요 모든 게 열악했다.

 

그러다보니 자꾸 왜 안 되는지만 목사부터 열심히 말하게 되었다. 여긴 교통이 안 좋아서. 지하실이라서. 분위기가 너무 냉랭해서. 교회할 자리가 아니라서. 금세 교인들도 따라서 말하기 시작했다. 서로들 왜 안 되는지 말하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그 말들을 들으니 너무도 마음이 안 좋았다. , 이건 아니구나! 상황이 교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초 치는 말만 모두들 하게 만들었던가. 그런 분위기로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이렇게 굳혀지고 말 것인가.

 

교인들에게 우리 교회가 좋은 점을 50개만 찾아서 써내라고 했다. 안 내는 사람 하나도 없도록 모두가 적어내라고 했다. 다음 주까지 서로 토론도 하고 머리를 짜내어 적어오라고 했다. 많이들 적어왔다. 명품 교회다.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교인들이 자부심이 있다. 목사님이 훌륭하다. 복음적이다. 내용을 자세히 쓰니까 금세 50개가 넘어갔다. 물론 오버한 내용도 많이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 말을 바꾸어서 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무나 못 옵니다. 자신 있는 사람들만 옵니다. 차 있는 사람들만 오면 됩니다. 명품 교회니까요. 분위기가 금세 달라졌다. 명품 원하는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다. 목사는 교회의 핵심성격을 정해야 한다. 아무 것도 안 하면 그냥 저절로 아무 특성이 없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성격은 무엇일까? 절대로 부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잘 할 수 있는 것, 목표로 세울 수 있는 것, 그것도 현재 상황과 연결되어서 올릴 수 있는 것을 정하라. 특별히 목회자의 특성과 관련되어야 한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정해 보라. 설교라면 말씀의 교회로 해야 하리라. 목회자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하기 좋아하면 사랑의 교회 또는 돌봄의 교회, 함께 잘 되는 공동체, 이런 식이다. 셀 중심으로 할 수도 있다. 가난한 지역이라면 서로 돕는 교회 잘 사는 지역에서는 명품교회로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목회자가 그 말에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설교학> 강의 중에서 지도력과 설교

 

그동안 강의하다보니 한국교회 전체를 사랑하게 되면서 동역자들이 행복하고 의욕이 넘치는 목회하는 것을 참으로 보기를 원하게 되었다. 정말로 교회가 살아나고 동역자들이 일어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다.

 

설교연구의 단계

설교를 연구하다 보니 과정이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설교의 내용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라고 외쳤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주신 일이다. 또한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는 아무리 감동적이라도 복음적인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자나깨나 복음적설교 복음적설교를 외치게 되었다. 복음제시가 설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지였다. 성경주해를 하더라도 거기서 복음을 반드시 발견해 말해야 한다.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주해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저 도덕강론이나 수필식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아무리 복음적인 설교라도 청중이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듣게 하자니 설교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했다. 감동적이어야 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건 듣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게 되었다. 설교작성도 그렇고 전달도 그러했다. 이것들이 없이 복음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설교작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논지가 하나여야 한다.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작성하려면 먼저 이 한 문장을 작성한 다음에 그것을 보고 다른 부분을 써야 한다. 그래야 설교가 끝난 다음에도 이 한 문장은 마음 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은 반드시 복음이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오고 가지가 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듯, 하나의 복음적 논지가 일어나 강한 설교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대지들은 물론이거니와 예화나 권고도 모두가 같은 색깔로 펼쳐져야 한다. 부분적으로는 전달이 잘 안되어도 결국에는 단 한 문장의 복음이 마음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고 살아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발한다.

  

전달을 위해서 전달의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들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기술이 있다. 타고 났건 습득한 것이건 설교자들은 반드시 전달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의 내용으로는 10%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 나머지 90%이상은 음성과 표정과 분위기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게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말의 내용이 두려워 마세요해도 음성이 떨고 있다면 듣는 이들은 음성을 믿지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듣고 난 뒤에 다른 소리 하는 것은 왜 그럴까? 듣는 이들이 분위기를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로는 다른 내용을 주었다해도 사람들은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분위기가 자기가 들은 내용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아무리 전달을 잘해도 설교자의 믿음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즉 설교의 내용이 곧 자신이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한다는 확신 속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확신이다. 그것 없이 설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지친 목회자들

회자들은 마음이 짓눌린 상태이다. 교회는 부흥되지 않은채로 여러 해가 지났다. 장로나 중직들은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한다. 설교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러 가지 한계에 봉착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그러면 습관화된다. 그리하여 아주 고갈된 마음으로 강단에 임하게 된다. 마음의 확신은 다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설교가 나오겠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의욕이 넘치고 자신이 있다. 자연히 목회가 재미있다. 체질에 맞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해서도 핑크빛이다. 이런 분들은 확신을 가지고 설교한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적인 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상황이 좋기에 나오는 기고만장일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확신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다.

  

만약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치자. 잘 극복이 되면 다행이다. 그러면 교회도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잘 극복이 안되고 시간이 지난다. 은혜스럽지 못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그러면 어느 사이에 마음은 가라앉아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면 이제 마음이 그렇게 굳어 버린다. 그 목회자의 마음은 멍들고 병이 깊어진다. 패배 의식이 지배한다. 설교도 힘이 없다.

 

작은 교회로 오래 지내온 목회자들의 거의 대다수가 이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교인중 누가 나 나가라하지 않을까? 누가 내 욕하고 있지 않은가? 불만을 품고 있지 않나?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생각대로 모든 관점은 움직여 나간다. 교인들이 웃으면 나를 비웃는 것이요, 안웃으면 역시 나를 비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행동강화라고 한다. 사무실 한 구석에서 직원들이 모여 담소한다. 웃으며 난리를 친다. “흠 저 친구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일단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의 행동은 그 생각을 강화시킨다. 너무도 화가 난다. 참다가 모른척하고 옆으로 지나가며 들어본다. 그러나 전혀 자기 말이 아니다. 그러면 내 이야기 아니구나하고는 내가 괜히 오해했구만할까?

   

천만에. “저것들이 어느새 알아차리고 주제를 바꿨구만하고는 다음에는 증거를 잡고말테다하고 생각한다. 일단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모든 행동을 해석한다는 원리이다. 일단 열등감에 잡힌 사람은 남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자기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시 자신의 열등감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렇게 한없이 진행한다.

  

목회자도 부정적 사고에 잡히기 쉽다. 예를 들어, “나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가면 큰 문제이다. “저 장로들은 나를 싫어한다. 내 편이 아니다.” “내 설교를 싫어하는 교인들이 제법 있다.” “내 아내가 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교인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마음에 독을 뿌려서 썩게 만든다. 그래서 어두운 마음으로 목회하게 한다.

 

이미 20여년전의 일이다. 어떻게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지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대다수 그러니까 70% 이상 되는 이들의 신학하게 된 이유가 동일하였다. 어느날 주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러다가 다른 길로 나간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주의 채찍이 무서워서 신학의 길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비참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하나님은 말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분이다. 이러한 이해는 늘 그러한 하나님을 기대하게 만든다. 목회의 길로 나섰어도 늘 채찍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하나님도 같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다시 말해서 믿는대로 삶이 펼쳐진다. 이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분이다. 교인들은 복음적인 신앙을 접할 기회가 없게 된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아니 자기의 한계보다 훨씬 자신을 약하게 본다. 해보지도 않고 자기는 은사가 없다고 단정한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와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가 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우리 자신 밖에 남을게 무엇인가?

  

믿음으로 사고해야 한다

신자라면 모든 부정적인 사고는 일단 거부해야 한다. 자신의 몸이 약하다던지 병이 있다던지 말을 잘 못한다던지 성질이 나쁘더던지 의지가 약하다던지 나쁜 습관이 있다던지 그것이 무엇이건 받아들여서는 않된다. 받아들이고 나면 그 굴레 얽매어서 삶을 살아야 한다. 주께서 성령을 부으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지 않으셨던가! 도대체 주의 말씀말고 무엇을 믿을까?

  

단번에 몸이 건강해진다던지 성질이 바뀐다던지 나쁜 습관이 고쳐지지는 않을지 모른다. 물론 믿음에 따라서는 당장 고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웬만한 좋은 습관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반복함으로 만들어진다. 약한 몸도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씩 운동하면 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은 다시 믿음을 더해주고 믿음은 다시 강한 경험을 일으킨다.

  

목회자는 스스로가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물론이고 얻은 체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다시 그 말씀이 미래에 더 나은 체험을 만들 것을 믿어야 한다. 여러해를 하나님과 함께 살아왔으니 거기 해당되는 경험도 대단한 것이 쌓여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설교는 결국 사람의 신앙인격을 보여준다.”

 

교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장로나 중직들에게 눌리면 대단히 어려워진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게 되고 당당함이 사라진다. 이렇게 오래 지나다 보면 지도자로서의 풍모는 사라진다. 아무래도 그들은 목회자들의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면 다음 사역지가 막막하지 않은가. 이런 식의 생각이 주의 종으로서의 마음 자세를 버리게 한다.

  

목회자는 절대로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으시대서도 안된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주의 종의 긍지를 잃으면 큰일이다. 하나님이 뒤에서 종을 밀고 계신다는 생각을 놓치면 안된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뭐가 두려울 것인가? 그래서 결국 목회나 설교나 다 믿음으로 이야기가 결론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 .”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에는 군대도 은행도 다 있다. 도움과 자금이 밖에서 오는게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온다. 왕이고 제상장이라면 지배해야 한다. 지배를 당할 수 없다. 물론 이 지배는 예수처럼 하는 사랑의 지배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꾸는 엄청난 능력이다.

 

장로나 중직들이나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보자. 사랑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졌다고 하지 않는가.(5:5) 그러면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정말로 우리는 세상이 가지지 않는 주의 사랑을 가진 존재이다. 사랑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원수 같은 이들을 무조건 사랑해보라.

  

주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고 했다. 신자라면 이처럼 해볼 수 있다. 목사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일단 마음을 이렇게 먹으면 참으로 편안해진다. 그러나 다른 여러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은 복잡해 진다. 그러면서 목자의 위치를 벗어나서 품꾼의 위치로 전락한다. 모든게 마음대로 안될 것이다.

설교도 그렇다. 이 설교를 듣고 변해질 사람들을 기대하면서 작성해야 한다. 설교 비판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작성하는 것은 너무 부정적이다. 그들의 비판을 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영감을 막는다. 그래서 인위적 설교를 만들어낼 것이다. 설교 만들기도 대단히 힘든다. 그리고 자신도 없다. 누구건 이 설교로 변해지고 나아지고 하나님 닮아갈 것을 믿으면서 써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엄청난 일이다. 그 일을 통해서 변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도 믿기만 하면 그들처럼 살 수 있음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양들이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능력있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요 목회다.

 

지도력 개발

목회의 힘은 지도력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가 지도력에서 탁월하였다. 이것은 세상적 의미의 지도력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세상적인 지도력은 타고난 자기 것을 자기의 노력으로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지도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무한한 것이다. 단지 그 지도자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 개발하시도록 맡겨드리면 된다.

  

그러나 말처럼 그것이 개발되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적 지도자들은 도전이 올 때마다 자기 속에 주어진 그 힘에 의존해서 응전을 한다. 그러다보니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응전이 나올 것이다. 비록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라도 여전히 인간적인 힘과 지혜가 근원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지도자는 절대적으로 그 힘이 하나님에게서 온다.

 

여기서 앞에서 말한 복음적인 설교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지도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공하신 새로운 삶과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안다. 만약에 복음적 지식이 없다면 자기가 기도나 선행하는 것만큼만 힘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주어진게 아니라 노력하는 것만큼 올 것이라는 것이다.

  

중생한 신자는 일단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을 때 그 힘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시작해도 세상에서 시달리다 보면 경험을 더 믿게 된다. 그래서 확신이 사라지고 불신자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적인 지도력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계속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지도력은 복음의 말씀을 믿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감각적인 세상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자기가 만들어야할 세상을 보아야 한다. 목사는 변화될 교인들의 모습과 교회를 믿음으로 바라 보아야만 한다.

 

이것을 비젼이라고 한다. 비젼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일단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 꿈이 있다.(요엘2:28) 이것이 성령받은 증거이다. 이 꿈이 자기 삶을 지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여기다가 자기에게 주어진 터전의 현실이 덧붙여진다. 거기서 모든 가능성들은 다 모아지고 발견되어서 성령의 꿈과 합쳐진다. 그러면 아주 현실적인 비젼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이 비젼을 구성원들에게 심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두가 이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게 만들어준다. 목사는 장기와 단기 목회에 대한 비젼이 분명해야 한다. 성령 받으면 다 꿈이 있다. 여기다가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는 모든 가능성중 가장 강한 것들이 모아져서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계속적인 시도를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한 사명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자기의 상황을 바꾼다. 경영을 잘하거나 행정을 잘 한다고 지도자가 아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비젼이 있다. 그것은 현실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구성원 대다수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거기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의 사명이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구성원을 움직여서 그리고 나아가게 한다.

 

절대로 안되는 이유만을 나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이다. 어떻게 하면 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지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현재 주시며 더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도록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는가!

  

설교자는 이렇듯 비젼 속에 설교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가 주의 말씀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고 자기 상황을 끌어일으키는 꿈을 찾아야 한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있으니까. 절대로 현실에 짓눌리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바꾸어야할 대상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도 불변의 것도 아니다. 창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우리 일할 터전이다. 이 확신으로 설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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