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정의롭고 평화로운 한민족공동체 주도해야

추천 : 0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7-07-03 12:40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

한국교회의 선교지는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선교의 대상은 대한민국 국민, 한민족이어야 한다. 그것은 남함만의 선교도 아니며, 북한만의 선교도 아니다. 남북한 민족 모두의 선교여야 한다. 아니 200여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선교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남북분단)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진리를 잃어버렸다.

교회는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 근거한 신앙공동체이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세상권력과 결탁해서 부자교회가 됨으로써, 간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등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최태민 목사-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분명해진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북한과의 대화는 적그리스도와의 대화라고 관념적인 말들을 서슴치 않고 늘어놓는다. 관념적인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북한과 미국의 전쟁에서 국민 100만명이 죽어도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왜 교인 3명 중 1명이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떠나겠다고 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이 같은 결과의 여론조사는 한국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교회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다르게 말하면 한국교회가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이신 하나님나라운동, 예수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배고프고, 병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슬픔에 잠긴 떠돌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주변에는 예수님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해 잘난 예수쟁이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 등등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말들을 절절히 늘어놓는다.

예수쟁이들의 이 같은 답에 대해 이들은 “좋은 분이시네요”라고 하면서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고픈 배를 채워줄 밥과 사람대접을 해 줄 수 있는 이웃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구원이니, 천국이니 떠들지 말고, 밥을 먹여주는 사람이 최고이고,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 행위는 가난하고, 천박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창녀, 병신, 세리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셨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그리고 이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들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한 원로목사는 하나님의 자리를 오늘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빼앗아 버려, 기독교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배고프고, 굶주리고, 병든자, 떠돌이, 병신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성서교육과 가르침을 통해 잘 알고 있는데, 왜 한국교회는 역사의 현장에서 이를 증언하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 끝을 헤매셨다는 것도 교육받았다. 잘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배고프고, 굶주리고, 병든자, 떠돌이, 병신 등 보잘 것 없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다. 그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추상적이며, 감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루려고 하셨다. 항상 현실적인 문제에 고민하고, 그것을 해결하셨다.

  
 

역사의 현장 계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었고,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갇힌 자를 풀어주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기쁜소식)은 말이 아닌 행동하는 것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라. 그러면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바벨탑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부 단체와 교회에서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 그래서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에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한다.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가난했지만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 노동자, 고난당하는 사람 등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교회였다. 교회는 작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다. 최소한도 맘몬이 신의 자리를 빼앗지는 못했다. 그런대로 교회의 본질과 가치관을 유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으며,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선교 100년 만에 1300만 명이라는 교세로 급성장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하다. 60-80년대 교인들이 몰려오면서 한국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했고, 하나님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기 시작했다. 수백억원, 아니 수천억원을 삼켜버린 공룡교회당이 등장했다. 세상과 소통하지를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이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다. 교회는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대형 교회당을 채우기 위해 곁에 있는 작은 교회의 교인을 빼앗는 세태까지 일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성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규탄하며,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심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버린 한국교회를 향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이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한국교회를 향해 어떤 심판을 내리실까(?) 다윗문화에 길들여지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쯤 생각해야 할 갈림길에 놓여 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고 했다. 부자청년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부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자격도 없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큰소리로 예수! 예수!를 부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분명 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이다. 예수님도 역사의 현장에서 행동하며, 가난하고, 미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 창녀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다. 오늘 한국교회가 고통스럽고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 행동했다면, 세상으로부터 비난은 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골방기도’를 여기에서 멈추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인 광장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야만 교회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고, 돌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이 어디냐는 것이다. 그곳은 민족의 염원인 분단의 현장이며, 민족통일의 현장이다. 또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떠돌이, 불구자, 노숙자, 농민,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다. 한국교회가 성장했던 당시에는 어떤 형태가 되었던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선교를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성장한 한국교회는, 아니 영미의 식민지지배자의 신학과 경건주의 신학, 이데올로기신학, 근본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영미의 식민지신학, 지배자의 신학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민을 떠난 교회, 민을 떠난 종교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종교의 역사를 보면, 어떻게 몰락했는가(?)를 분명하게 답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회의 자리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민심을 떠난 종교는 한마디로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이다.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최태민 목사-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박근혜 대통령 하야, 퇴진을 요구하는 민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오방과 악령, 그리고 사이비 종교와 자유롭지 못한 박 대통령 감싸기에 모든 힘을 결집했다. 그리스도인 누가 보아도 이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단체의 촛불집회에 대한 맞불집회에 여지없이 목회자들이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을 감싸는 글을 sns를 통해 퍼 나르기에 바빴다. 나라를 걱정하기 보다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오히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수백만명의 촛불을 ‘사탄’, ‘빨갱이’, ‘용공’, ‘좌파’로 규정하고, 비난하기에 바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사이비 교주 최태민 목사와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말로 해석된다.

사실 한국교회 상당수의 목회자는 최태민 목사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최태민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몇몇 목사는 2000-3000만원을 주고 별을 사서 지프차에 달고 다니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사태가 불거지면서, 최태민 목사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던 목회자들의 면면도 속속 들어나고 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일부 목회자는, 최태민 목사의 잘못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오방과 악령에 사로잡힌 청와대를 감싸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최태민 목사가 목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당연한 행동이다. 문제는 이들이 주류를 자처하며, 한국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물론, 이들은 피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십자가탑의 네온 불빛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자, 떠돌이, 농민, 노동자, 병신 등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전기로 고문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은 호화로운 교회당에 오시지 않았다. 호화찬란한 네온에 오시지 않았다. 말들의 밥통인 말구유에 오셨다. 아니 가난하고, 소외되고, 미천하고, 병들고, 떠돌이, 농민들 속에 오셨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셨그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고발돼 예루살렘서 고난을 당하셨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교회

교회는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기능을 회복하고 성경적 경제와 사회적 정의의 기준을 제시해주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질서가 회복되도록 즉 하나님이 생각하신 세상을 만드는 것을 충실히 도와야 한다.

요즘 ‘김영란 법’은 언론인과 선생님, 정치인들을 향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돈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돈을 신’으로 만들어 버린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돈과 권력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은 자신에게 한번쯤 물어야 한다. 권력과 결탁해서 부자가 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용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버림받은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과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한국신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