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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배반 하는 이유
조회 258 추천 0 비추천 0 2017-12-02 18:58 작성자 : 김목사

복음을 배반하는 이유 및 원인


복음을 영접한 후 그 복음의 진리에서 다시 등을 돌린다는 것은 가장 악한 죄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백성이 “그를 잊고” 그로부터 멀리 떠났다고 자주 불만을 토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가르침을 잊고 그와 백성들 간의 영적 교감 및 교제의 수단인 그의 율례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신 28:20 삼상 8:8 대하 34:25 렘 5,7,19, 16:11 참조).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끔찍하게 대했는지를 확신시켜 주시려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무슨 불의를 행했는지, 무슨 잘못을 행했는지, 그들이 그의 율례를 싫어하고 그에게 예배드리는 것에 싫증을 내어 그것들을 거부하고 거짓 신과 그 악한 길을 좋아할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망시킨 일이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으면 그것을 찾아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좇아 보았자 이생에서나 금생에서나 결국 자신들만 많은 곤란을 당할 뿐인데 말이다(렘 2:5 겔 18:25 참조).
만약 하나님의 율례와 예배에 불평할 아무 이유가 없다면, 만약 그 율례와 예배가 전적으로 거룩하고 공평하며 선한 것이라면, 만약 그것을 지키는 데에 큰 상급이 보장되어 있다면, 만약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들 평생 동안 선을 행하시는 것이요 악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백성임을 고백한 후 그 복음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 행위보다 더 악한 것이다. 복음을 영접한 후 그 복음으로부터 멀어져간 사람들의 죄책은 옛날 유대인들이 저지른 그 우상숭배의 죄보다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을 보다 더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으며 율법 아래서 주어진 어떤 계시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계시이기 때문이다.
배도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대체 어떻게 복음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영접한 후 다시 복음을 저버리는 것일까?


복음을 배반하는 원인과 이유

사람들이 복음을 저버리는 이유는 영적인 모든 일을 대적하는 마음이 그 심령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
회심하지 않은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그 심령에 계시될 때 그것에 순복하기를 원치 않는다. 비영적인 자연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다.(빌 3:18) 자연인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저버리는 자다.”(딛 1:16)
복음이 처음에 전파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에 마음이 움직여 기쁨으로 그것을 영접했다. 왜냐하면 표적이 그 복음의 진실성을 확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가르침에 따를 의사는 그 마음에 조금도 없었다.(요 2:23,24 행 8:13 참조)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신 후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떡”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을 대적하는 자연적 성향이 그들 마음 가운데 여전히 남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비밀들에 대해 가르치시자 그들은 즉시 “그에 대하여 수군거리고” “서로 다투기”시작했다. 그러고는 그가 자기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라고 간주해 버렸다.(요 6:41,52,6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불신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그들의 육신적인 생각 속에 들어있는 그 대적하는 마음을 움직이시어 그리스도께로 이끌지 아니하시는 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지도 믿지도 못한다는 것이다.(요 6:64,65 참조)
그 군중들은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68절 참조).


복음의 진리가 인간 마음속에서 행하고자 하는 것

복음 진리의 목적은 인간의 눈을 뜨게 하여 현재의 평강과 미래의 영광이 자기 자신 및 자기 의(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죄인의 타락한 마음, 의지 및 소욕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인간 전인-육체, 혼, 영-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도록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파고들어가 실천을 강요하게 되면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적대감이 일어나 그것을 대항하게 만든다.
회개치 않은 마음은 이 진리를 가지고 사색, 쟁론하며 장난을 치는 동안 이 진리를 아주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해 이 진리의 인도까지 기꺼이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개치 않은 마음은 자신의 자유의지 아래 모든 일이 다 지배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여전히 자기 충족 및 자립이라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막 6:20 참조).
그러나 이 진리가 가슴에 있는 지성소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 자기 충족, 자립 및 자기 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것을 촉구하면, 그때는 그들 마음속에 잠복해 있던 그 옛 원수가 그 복음 전체에 일격을 가할 기세로 독사처럼 즉시 일어서는 것이다. 육신과 마음 안에 있던 모든 정욕들, 옛 성품의 온갖 거짓된 소욕들, 죄의 모든 세력, 장사 지내지 않은 모든 육신적 소욕들이 진리에 대적하기 위해 일어선다.
그래서 지성(mind)으로만 받아들여진 영적 진리가 우선 무시 된다. 그런 다음 그 진리가 경멸되고 마침내 잊어버림을 당한다.
인간은 설득이나 자연적 이유 및 동기들에 의해 복음을 진리로 영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그들 양심에 적용되고 그 의지와 욕망이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 안에서 걷도록 회개할 것을 촉구 받을 때면 그 옛 원수가 일어나 진리를 대적한다.
복음의 진리는 알미니안주의가 부르짖는 대로라면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대로 믿으면 인간 마음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원수가 마음의 모든 결정을 장악하고 자립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진리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고 하자. 즉,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우선되지 않으면 인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고 가르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원수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호소해서 그 모든 힘을 다 동원하여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자연계시에 대한 적대감

바울은 인간의 적대 감정이 어떻게 자연계시를 대적하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롬 1:18-32참조).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자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대해 계시하셨다. 인간은 이 계시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로부터 도망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일부분인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그 진리를 불의로 막았다(18절).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 그들은 버러지 형상의 우상과 짐승 같은 정욕에 자신들을 내맡겼다.


영적계시에 대한 적대감
바울은 또 영적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의 모든 속임수가 역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살후 2:10) 무엇보다도 그들은 진리가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런 다음 진리를 거부하고 대신 가장 더러운 오류와 역겨운 미신들을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거짓되고 허탄하며 어리석은 사상들을 다 받아들인다. 그들은 강한 관심과 편견을 가지고 이 사상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마음에 못처럼 단단히 박히게 된다. 그 생각들이 마음속에 어찌나 단단히 박혔는지 복음의 진리(무오한 증거와 가장 엄중한 경고가 수반된)를 아무리 강력히 제시한다 해도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받아들인 오류들을 부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단 종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역사상 이에 대한 큰 예가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불합리한 불신앙에 집요하게 매달려 조상 아브라함이 믿던 믿음으로부터 배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렇게 극심한 역경과 끔찍한 재앙들이 그들에게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심지어 오늘 이 때까지도 그 오류, 우상, 신성모독, 미신들에 꼭 들러붙어 있다. 그 교회 안에는 학식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하기야 그동안 열방의 왕이나 통치자들마저 어리석게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 불경, 미신 및 우상을 지지해 왔으니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보다 더 어리석고 한심한 종교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집요하게 달라붙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항상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는 상태에서 오류를 일단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오류는 진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인간의 육신적인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오류가 타락한 마음에 더 잘 맞기 때문이다. 타락한 마음에는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영적인 일들과 하나님에 대한 그 적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으로부터 타락한 인간 마음은 무엇이 선과 악이며 무엇이 참과 거짓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며, 그 자신의 구부러진 길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전 7:29참조).
이래서 “불법의 비밀”이 이처럼 큰 배도를 성공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 배도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만약 인간이 진리를 이성으로만 받고 가슴으로 사랑하거나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항상 배도의 위험이 있다. 이 원수가 정복되어 쫓겨나지 않는 한, 그 마음이 전적 부패로부터 자유케 되지 않는 한, 그 진리가 인간의 가슴과 영혼에서 능력 있게 효율적으로 역사하지 않는 한, 그 진리를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 그대로”배워 인간이 “그들의 이전 행실을 벗어 버리고 타락하여 거짓된 정욕들로 가득 차 있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타락하여 거짓된 정욕들로 가득 차 있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 형상 안에서 의와 참 거룩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지 않는 한,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가 자신들에게 가져다주는 영적 평강, 능력 및 자유함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한, 핍박이 오면 그들은 복음을 버리고 다른 것들을 찾아 떠날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한 후 복음의 가르침을 떠나게 되는지, 이 가슴 속에 있는 원수가 바로 그 첫 번째 원인이다.
이 복음의 배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슴으로 진리를 사랑하며 그 진리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참 종교는 율법에 의해 세워져 권위자들에 의해 지지 옹호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원수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뿌리째 뽑히고 그 자리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 대신 심기지 않는 한 배도에 대한 진정한 방어책은 없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종교 개혁을 단행한 후 어떻게 로마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계에 있는 이 나라 저 나라로 다시 돌아와 황폐화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이 돌아오는 것을 금하는 엄중한 법을 세우면 가능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튼 참 종교의 영광에 무서운 벌칙이 수반된 엄중한 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오류에 대해 반증하는 글을 쓰면 그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 글을 읽고 진지하게 생각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에 대해 인간 가슴에 대고 효과적으로 알려 주시는 길만이 배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가슴으로 사랑하고 의지를 동원하여 기꺼이 즐겁게 순복해야 하는 것이다(롬 6:17 참조). 그 진리의 능력과 사랑이 사람들 가슴 속에 심겨질 때, 그때에야 비로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우리 땅에서 다시 한 번 내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복음의 진가를 모르는 한, 그들이 가슴으로 복음을 받아 그 말씀대로 살 때 복음이 가져다주는 그 엄청난 유익을 모르는 한, 어느 누구도 복음을 끝까지 신실하게 믿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가슴으로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대뜸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의 율례를 지킨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에 빛을 비춰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신”다면, 그들이 미신과 전통이라는 무거운 멍에로부터 양심이 자유케 되었으며, 자기들이 영접한 그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속사람이 새롭게 되고 자기들 삶이 변화되었음을 발견한다면, 그래서 영생한다는 소망이 속사람 속에 굳건히 박힌다면, 무슨 일이 닥치든 이제 그들은 죽기까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진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참 종교의 단순한 외적 모양만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하는 일을 막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열심과 거룩의 본을 보이며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들 마음을 얻고, 복음의 진리 안에 있는 그 기쁨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며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며, 본인들이 그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정말 그들 심령 가운데 능력 있게 심겨져 있음을 증명하는 일 - 만이 교활하게 계속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배도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유일한 방법이다(행 20:32참조).


“그러나 우리에게는 평범한 은사밖에 없는 반면 사도들에게는 놀라운 은사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이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 아닌가?”
사도들은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해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놀라운 은사들을 받았다. 우리는 평범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평범한 은사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평범한 은사들을 놀라운 은사만큼 효과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 인간의 심령에 있는 그 원수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곳에 참 회개와 믿음을 심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놀라운 표적을 많이 행하셨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믿지 않았다(요 12:37 참조).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기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설교하는 교사들을 지명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진리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로 돌아설 것이다(딤후 4:3,4 참조).
그렇다면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디모데는 무엇을 해야만 했던가?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1,2,5).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도록 부르심 받은 평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평범한 은사를 덧입혀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의해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들을 가리켜 “죄의 종이었으나” 저들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롬 6:17,18참조).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종교를 보존, 확장하는 법


첫째, 힘을 사용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동안 이 세상에서 그 종교를 보존 확장하는데 있어서 항상 힘을 사용할 것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자기네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 핍박, 파멸 및 파괴를 일삼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종교를 보존, 확장하시기 위해 힘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셨던가?


둘째, 인간의 죄된 정욕과 타락에 편승함으로써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양을 지닐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자연인은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골 1:21 참조).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8-19 참조).
이처럼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그의 복음에 대해 대적하는 마음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니 인간은 마음으로부터 그 진리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 3:19,20 참조).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인간을 더 찬양한다(요 12:42,42 참조). 진리를 영접한 것처럼 보이나 그 진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살후 2:10 참조).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그리고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사도의 명령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인간의 정욕에 편승하든지 해야만 한다.
죄인이 가지고 있는 은밀한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현세에서 가능한 별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세에서 받게 될 형벌은 절대 받지 않고도 자신의 죄 된 삶을 계속 영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라.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생각들 그리고 장래의 상벌에 대한 의식을 모두 지워 버리라(시 14:1, 10:4 참조).
그러나 무신론자가 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롬 1:19). 무신론자는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창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의 증거들로부터 도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1:20참조). 무신론자는 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도 없다(롬 1:32참조). 따라서 무신론자가 겉으로 큰소리치는 것은 사실 보면 속에 있는 두려움을 그렇게 위장하는 것뿐이다.


(2)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죄된 정욕에 빠져 살면서도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를 그들에게 주라(딤후 3:5 참조).
죄와 양심이 평화롭게 공존해서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죄는 양심을 거절하고 양심은 죄를 거절한다. 그래서 둘이 공존하는 한 평화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 속에서는 그 둘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벧후 2:18,19 참조).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먼저 타락한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바꾸는 중생이라는 사자(獅子)를 제거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종교로 들어가는 것을 단념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라는 외적 의식이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죄에 대해 영적으로 죽고 전심을 다해 순종하게 되는 전인의 내적 성화를 대신하는 무엇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만족을 얻으나 죄가 그 사람을 계속 지배하여 결국 죄에 빠져 살게 되도록 말이다.
따라서 사죄, 매일의 미사, 속죄를 가져다주는 기도 또는 사물-최악의 경우에는-연옥이 있어서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서도 장래의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해준다. 죄를 자백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자선금을 기부하면 사람들이 죄를 그대로 짓고 살면서도 자기 양심을 달랠 수 있다.
이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영접한 후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시 돌아선 것이다. 사람들은 그 교회 안에서 양심을 달래면서 편안히 자기들의 죄된 방식대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 (존 오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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